살아내다/하루

논쟁의 끝에서

최범준 2012. 3. 8. 23:38

논리를 좋아한다. 불합리에 쉽게 분노하고 못 견뎌한다. 종종 신앙에 있어, 하나님이라 일컫는 세계의 신을 놓고 볼 때 유한하고 제한적인 하위개념이 그보다 상위개념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의미없음이요, 끝을 알 수 없는 것을 잘 앎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거기에 강하게 휘둘릴 때가 있다.

나보다 더 뛰어난 논리를 가진 자가 상대진영에 나타난다면 나의 지적신념은 산산히 부서지겠지만, 그렇다고해도 내 신앙이 바뀌진 않는다. 나 자신의 정체성-'부르심'이 바꿔놓은 신분은 흔들림조차 없다. 왜냐면 내가 지, 정, 의 모든 부분을 통해 하나님을 알며 또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연속된 경험 즉, 삶으로 체험되기 때문이다. 어느부분에 가면 내가 전개하는 모든 논리가 이미 깨진 것이거나 무의미한 것을 깨닫게 된다. 될 것이다. 무엇을 얼마만큼 더 알아도 시간의 문제일 뿐, 흡사 기정사실처럼 명료할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나는 무엇을 말 할 수 있는가? 또 다른 것을 찾고 탐구하기에 이 땅에서 내 삶은 유한하며 나의 능력은 그것보다 더 작고 작다.

그때 나는 내게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것이 살린 사람과 맺어진 열매들을 보여줄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하나님이라는 초월적 개념을 나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불분명하고 불완전스럽지만)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거나 저기 있거하나는 영토의 개념이 아닌, 우리 안에 있어 우리가 그 분을 알고 살아내는 만큼 유효하게 되는 통치권의 개념인 것처럼 말이다.

앞서 나의 길을 걸었던 박목사님이 나보다 더 많은 지식을 알고 계실것임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그것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내는 이유는, 그 분이 앞서 나와같은 고뇌를 거친 후 내린 결론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 분은 낮은 자리에 숨어들어가 사람을 살리고 있다. 예수없는 가치관이 교회속깊은 곳에 뿌리내렸어도 우직하게 하나님나라 가치관을 삶으로 선포한다. 한때 잠시 그 분의 목회철학이 하나님 안에서 틀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을 한 내가 틀렸다. 그 분의 목회철학은 주 안에서 옳다. 나는 그 부분을 비논리적이고 또 반지성적이라고 오해했다.

지금, 나의 시선은 어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