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내다/말씀묵상

삭개오 일화를 묵상하며 - 2.내면화된 영성, 멀어지는 용납

최범준 2014. 2. 6. 11:29

  삭개오. 사회적 권위는 가지고 있었지만 동족에게 외면당했던 사람. 동족으로부터의 소외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입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당사자가 오버하는 거라 생각할 만큼 말이죠. 그러나 이 소외감, 단절의 고통은 인간이 지닌 태초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절감정을 경험한 가인이 결국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살인자가 된 것을 보십시오(물론 그 거절감정만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

 

  삭개오가 본래부터 재물을 많이 모으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를 영접할 때 우리에게 자유함 또는 자유 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찾아오는데, 삭개오가 벗어던진 것은 바로 그 모아둔 재물이기 때문이죠. 앞서 쓴 글에서 이 점에 좀 더 주안을 두었으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죄인 삭개오의 악순환을 끊어줄 방법은 그의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보다, 그의 속깊이 감춰진 상처를 정확하게 감싸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삭개오 이야기에서 뽑아내야 하는 메시지는 구원받은 삭개오가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보다, ‘약한 자였지만 악한 자로 비춰진 삭개오를 대하신 예수님의 구원방식을 주목해야 합니다.

 

 

 

약한자를 다루시는 예수님의 태도가 잘 드러난 만화

 

  구원에 대한 반응은 개개인이 모두 하나님께 개성 있게 지음 받은 것처럼 다 다릅니다. 개인이 구원받은 후 보인 단회적 회심과 성화의 과정을 타인에게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다양한 창조섭리를 거스르고 획일화시켜, 참된 자유함을 교묘히 비틀어버리는 마음가짐입니다. 마치 봉건적 권위를 타파하자는 계몽을 외친 근대 지식인들이 개화라는 또 다른 권위를 제공한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그것만큼이나 나쁜 것은, 악한 자가 악한자로 된 과정과 사정을 이해하지 않은 채 그를 정죄하고 바꾸려고만 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우리나라 개신교의 주류는 복음주의입니다. 이 복음주의는 청교도운동과 경건주의운동에 밑바탕을 두지요. 신앙에 있어 초점이 개인적으로 몰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에서 말하는 도덕윤리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것 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개인의 문제로 밀어넣습니다. 이 전형적인 태도가 기도응답이 안 되는 것은 니 기도가 부족한 탓’, ‘니가 실패한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다.’, ‘좌절하지 마라, 하나님 믿는다면서 왜 그런 약한 태도를 보이니?’가 있죠. 그리고 이런 토대에서 자라난 신앙인들은 외부인에게 서툰 종교의식에 기대어 착한 폭력을 행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제자됨의 태도는 이것과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13:34-35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 이사야 60:1-4

 

  사회와 개인의 유기적 이해가 실종된 채 개인 내면의 도덕적 경건만 쌓고 또 그것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감염시키듯 강요한다면 개인+개인+개인+개인=전체가 될 것이란 식의 편협한 사고방식은, 죄를 태워죽여야하고 죄인이 죄를 못버리겠으면 그 죄인도 같이 태워죽여버리는 화염방사기식 복음전파가 됩니다. 우리는 빛으로 부름받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방식이 유효하지 않은 세상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상처를 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전한 모습이 왜곡된 채 자라납니다. 상처받아 모난 이가 그 모서리로 다른 이들을 찌르는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바로 내 앞에있는 악만 상대하려합니다. 한때 FPS게임에서 유행한 좀비모드가 있습니다. 이 모드에서는 무조건 오는 좀비들을 끝도 없이 죽여야 하지요. 그냥 몰려드는 좀비를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죽여야 하고, 얼마나 버티느냐만 기록으로 남는 암울한 게임입니다. 해결책 없이 그저 좀 더 오래 견디다가 죽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건 마치 개인에게만 열을 올리는 개신교도들의 모습 같습니다. 이런 좀비모드의 원류가 되는 오리지널 좀비게임류에서 중요한 건 밀려오는 좀비들을 무작정 죽이는 게 아니라, 좀비를 양성하는 근원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죽은 비유를 들자면 가라지의 줄기를 매번 베어내는 것보다 뿌리를 뽑아내는 게 보다 나은 해결책이 될 수 있지요(‘진정한을 붙이지 않는 이유는, 그런 궁극적 회복과 완성은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에 만연한 상처받아 악해진 개인들도 그렇습니다. 개인 자체가 속부터 악한 인간이라기보다 공동체(가족에서부터 국가까지)로부터 크고 작게 단절된 경험을 통해 약한 자로 자라나고, 약함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그것을 가리기 위해 상처받아 모난 부분의 날을 세워 남을 찌르는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됨과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교회가 이런 통전적이고 유기적인 이해가 없는 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개인의 영성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모든 문제는 개인의 것이 되고, 아프고 나쁜 것도 개인의 문제고 개인에게 원인이 있다는 식으로 파악됩니다.

 

  또한 개신교는 남을 찌르지 않는 약한 자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지만, ‘남을 찌르는 약한 자에 대해서는 관대하려 애쓰지만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변화시키려합니다. 복음주의의 기반인 개인경건에 맞지 않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옛습관이 남아있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저는 도덕무용론을 주장하거나 성화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오히려 이 부분에 있어 저는 비교적 보수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삭개오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 지난번 글은 지금 이 글과 정면대치를 이루겠지요. 필자가 말하는 것은 그런 변화에 앞서 충분한 용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내 불량스러운 학생들이나 지체들을 바라보는 태도는 한결같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모습을 일부에서 전부 뜯어고치지 않는 한 교회 내 마음 둘 곳이 갈수록 좁아져서, 언젠가는 자발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구석으로 밀려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그들이 교회에서도 구석으로 밀려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이는 건축자의 버린 돌을 모퉁이 돌로 삼으시고, 강을 따라 버려진 한 아이를 지도자로 세우시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넉넉히 받으시는 하나님을 같이 내버리는 격이지요.

 

 

 

우리는 지금 Grace를 누리고 있을까요, Amazing frace를 누리고 있을까요?

 

 

  한편 왜 한국교회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생각해볼 때, 앞서 언급한 한국교회 주류사조가 빚어낸 회개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가 한몫 단단히 하지 싶습니다. 회개의 신약적 언어는 방향전환이자 돌이킴의 의미가 강합니다. 여기까지는 다들 아시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상하게 자기 깨어짐으로 왜곡되면서부터 ‘옛 자아가 완전히 죽어야 한다라던가 이전 모습을 버려야 한다’라던가하는 식[각주:1]의 완전한 탈바꿈과 정체성 부정의 말로 변질됩니다. 회개의 본질은 돌이킴입니다. 내가 이제껏 걸어온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가는 것이지, 이제껏 걸어온 나를 다른 나로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길을 걷다보니 이제껏 다른 길을 걸었던 내 모습과 달라진 자신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다른 길을 다른 모습으로 가라고, 절차를 무시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오히려 이점은 성화에 대한 개념 착오보다도 성화를 아예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믿기만 하면 다 잘된다는 식의 기복주의 신앙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화의 길을 이미 넌 새사람이고 다 회개해서 끝났으니 하나님 축복 하에 잘사는 길이라는 겁니다. 마치 우리가 이단이라 정죄하는 모 교단같습니다.

 

  이어서 살펴보자면, 성화의 과정을 일종의 공덕 쌓기로 왜곡시키는 것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중생-성화-영화를 이야기하며 거듭난 후부터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를 누리기 전까지 끝없이 예수를 닮아가는 과정을 성화로 여기는데, 이 성화가 단순히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어떤 직분을 얼마나 섬기고 헌금을 얼마나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얼마나 잘 참아내느냐?’로 이해되는데 있습니다. 성화를 확인할 장소가 너무 좁고, 그 요소도 지나치게 인본주의적이다. 그러다보니 단박에 마음이 말랑말랑해 순종 잘 하는 충성된 자가 되어서 안으로는 예배도 빠지지 않고 뭔가 직분도 맡고, 바깥으로는 열심 있게 전도하고 핍박에도 굴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하죠. 성령의 아홉 열매가 마치 리더(교사)헌신, 헌금하기, 모든 예배참석, 제자훈련 이수, 찬양팀(성가대)섬김, 수련회 필참, 노방전도, 금주금연, 바른말 고운말이 된 것만 같습니다.

 

  이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강요되는 가운데 교회문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시쳇말로 선한 코스프레를 하고, 처음 교회 공동체에 발을 디디는 속칭 죄인들은 얼른 그 대열에 끼어들거나 나가거나 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대안이 없습니다. 양적성장을 위해 많은 이들을 초청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그런 이들이 교회 공동체 가운데서 지속적인 교제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누리고 흘려보내도록 하는 것은 영 익숙하지가 않지요. 이른바 양적성장의 폐해라고 단언하면 섣부른 말입니까?

 

  예수님의 공생애사역은 사실상 실패를 향한 몰락의 길이었습니다. 당대 기대되던 메시아상과는 처음부터 최후까지 다릅니다. 중간에 초자연적인 힘을 보이는 영역이 있지만 그것도 목적이 달랐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것도, 예수가 궁극적 실패자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라 걸어가는 길은 결국 하나님이(우리 말고요) 궁극적으로 완성하실 그 나라까지 우리는 그냥 실패로 보이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사랑하려는데 오히려 상처만 받는 불합리의 길 말입니다. 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누리기보다 포기하고 섬기며 손해 보는 삶 말입니다. 신자유주의에서 가장 미련한 짓인 손해 보아 도태되는 모습 말입니다. 수련회 얼마나 갔고 한 해 회심한 사람이 몇 명이고 분기별로 몇 퍼센트나 인원이 늘어났느냐의 숫자놀음은 하나님나라의 법칙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기심을 먹고 사는 자본주의의 법칙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볼 때 성공한 사람과 번듯한 사람들이 많아서 흠모할만하면 거기 망한 거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니까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듯, 흠모할 것도 없는데 불구하고 뭔가 끌리고 편안한 마음이 드는 공동체. 구색 안 갖췄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진짜 나 될 수 있는 것만 같은 자유함을 주는 공동체. 삭개오같이 치가 떨리는 인간에게 정죄보다 먼저 안아주는 공동체. 죄를 지닌 죄인을 넘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세상에 같이 의롭게 분노하고 행동하는 공동체……. Kyrie eleison!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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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러나 이러한 말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해서 예수 믿고 안믿고를 기점으로 무슨 특촬물 주인공처럼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신화입니다. 우리의 옛모습이라고해도, 그 모습 역시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계획이 녹아있는 모습입니다. 다만 그게 깨어지고 온전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전적인 탈바꿈으로서의 변화는 기독교가 말하는 회개의 모습은 아닙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회개하라!' 역시도 '너네 죄지은거 토로하고 모습 바꾸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진다!'는 메시지로 절대 해석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땅의 모습에 절망하던 너희야, 떨군 고개를 들고 눈을 떠 하나님을 보아라. 로마에 억압당하고 제사장들에게 짓눌리던 너희 작은 자야, 네 시선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 보아라. 너희 눌린자, 주린자, 갇힌 자를 위한 그 나라가 왔다.'의 희망적인 선포에 더 가깝습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