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내다/하루
율법에 대한 단상 한조각
최범준
2011. 12. 27. 14:04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율법에 의거한 행위가 구원은 커녕 외려 악에 치우칠 수 있는 요소라고 말씀하셨다. 사랑의 두 방향, 수직과 수평에의 그것으로 온 율법을 압축하셨고 그것이 바울에게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엔 어떤 빚도 지지말라. 사랑하는 자는 온 율법을 이룬 자다'고 다시금 확증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보편적의미의 도덕률이나 가타부타의 판단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옳음에대한 추구나 갈망은 마치 탯줄의 흔적인 배꼽과 같아서, 우리의 존재가 분명 하나님과 이어져있었다는 증거라고 본다.
행위가 사랑을 잠식한 것이 율법이겠지만, 율법은 몽학선생(유아교사)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알아감에 있어서 불가분이라 여기는 바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덧붙여 야고보서를 휴짓조각취급했던 루터의 견해엔 동조하지 않는다)
도덕이니뭐니하는 것 자체가 결코 우리의 구원에 일원반푼어치도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은 분명하지만, 자연스레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어떻게 확증하셨는가를 궁금해한다면 흡사 아이의 소꿉놀이 수준일진정 그런 삶을 살아가는 동안 자연스레 따를 것이다. 마치 꽃이 피어나며 향이 자연스레 퍼짐과 같이. 그 향기의 농후함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이 보편적의미의 도덕률이나 가타부타의 판단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옳음에대한 추구나 갈망은 마치 탯줄의 흔적인 배꼽과 같아서, 우리의 존재가 분명 하나님과 이어져있었다는 증거라고 본다.
행위가 사랑을 잠식한 것이 율법이겠지만, 율법은 몽학선생(유아교사)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알아감에 있어서 불가분이라 여기는 바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덧붙여 야고보서를 휴짓조각취급했던 루터의 견해엔 동조하지 않는다)
도덕이니뭐니하는 것 자체가 결코 우리의 구원에 일원반푼어치도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은 분명하지만, 자연스레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어떻게 확증하셨는가를 궁금해한다면 흡사 아이의 소꿉놀이 수준일진정 그런 삶을 살아가는 동안 자연스레 따를 것이다. 마치 꽃이 피어나며 향이 자연스레 퍼짐과 같이. 그 향기의 농후함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