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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다/천성글쟁이

소설 야곱 – 1화 발꿈치를 잡은 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5:23

 

 

  소설 야곱 1화 발꿈치를 잡은 자

 

 

  “아버님, 오늘 제가 뭘 잡아왔는지 확인해보세요!”

 

  천막 밖으로 자신감에 가득 찬 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켜 문을 걷는 이삭의 얼굴에 정면으로 비치는 햇빛. 눈을 찌푸린 이삭이 손으로 빛을 가리며 슬며시 눈을 뜨자, 말 위에서 위풍당당하게 앉아있는 에서가 보인다. 그의 다부진 어깨와 굵직한 팔뚝의 붉은 털까지 햇살에 비치고, 그보다 더 붉은 그의 눈은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 나의 아들. 어서오너라.”

 

  이삭이 크게 환영하며 양 팔을 벌리자, 에서가 그대로 말에 내려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그때 장막에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리브가.

 

  “이번엔 일찍 왔구나.”

 

  아들을 반기는 그녀의 목소리에 다정함이 묻어났으나, 얼굴은 미묘했다. 그런 리브가에게 에서가 손에 입을 맞추며 가볍게 인사를 하였고, 이삭은 그런 그들을 번갈아 보며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야곱은요?”

 

  에서가 사냥해 온 늑대를 땅에 내리며 물었다.

 

  “장막 안에 있지. 네가 나갈 때부터 계속 옷을 만들고 있었단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였지만, 남들이 보면 쌍둥이는커녕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라고 믿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처음 날 때는 에서의 털이 붉고 풍성했던 것 외엔 별다른 특징이 없었지만, 점차 자라면서는 많이 달라졌다. 장막에 조용히 거하는 야곱과 달리 들판에서 사냥을 좋아한 에서의 몸은 갈수록 다부지게 성장했고, 야곱은 더욱 하얀 피부를 지니게 되었다.

 

  “야곱, 뭘 그리 열심히 만들어?”

 

  장막으로 들어온 에서가 물었고, 섬세하게 움직이던 야곱의 손이 멈췄다. 털 하나 없이 희고 고운 살결. 언뜻 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바닥을 짚고 일어난 야곱이 조용히 에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올 겨울은 유독 추울 것 같아서요. 다른 때보다 옷을 좀 튼튼히 만들고 싶었어요.”

 

  “차라리 몸을 튼튼히 하는 게 어떻겠느냐. 네 형처럼 밖에서 한며칠 사냥도 하고, 말도 타면서 대지를 누비란 말이다.”

 

  어느새 장막으로 들어온 이삭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좋아하였다. 야웨께 하나부터 열까지 복을 받은 것은 좋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부르심에 대한 순종만 있었던 자기 인생. 그러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에서를 좋아하는 것은 일종의 동경이기까지 했다. 아무리 하나님이 에서가 야곱을 섬길 것이라 하였어도, 에서의 자유분방함을 보며 저 아이는 혹시 다르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이는 동경이자, 집착이기도 했다.

 

  “, 아버지. 시간이 나면 그렇게 할게요.”

 

이삭의 퉁명스러운 기색에도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야곱은 흔들림 없는 조용한 소리로 답했다. 이삭이 야곱을 미워했느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분명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었지만 어딘가 꺼림칙했다. 무엇에든 순종적인 모습에서 과거 자신을 보았기 때문일까. 야곱을 더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도 분명 마음에 짐이었다. 야곱을 가까이 하려니 항상 그렇게 살아온 자기 인생에 대한 멋모를 억화심정이 그를 막아선 것이다.

 

*

 

  “장자의 명분은 에서에게 있지만, 사실 주님께서 택하신 장자는 너란다, 야곱. 그게 주님의 말씀이야. 그 분의 말씀은 모든 상황을 뛰어넘고 사람들의 상식을 웃돈단다. 네 아버지가 아무리 형인 에서를 아끼고, 에서가 장자권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주님은 너를 택하셨어.”

 

  그날 밤, 리브가는 야곱을 밤에 불러내어 토닥였다. 야곱은 아무런 대답 않고 어머니의 손에 입을 맞추기만 했다. 수없이 들어온 이야기였다. 어머니 리브가는 항상 자신에게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그 조금의 어둠도 없는 상냥함에 때론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야웨의 뜻을 제외한 채 온전히 야곱 자체만 놓고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존재에 투영된 야웨의 역사만 들어왔을 뿐. ‘자신이 무엇을 함으로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자신의 정체성.

 

  이삭만 야웨께 순종한 것은 아니었다. 리브가 역시 야웨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대로 순종하긴 마찬가지. 다만, 그러한 순종에 내심 염증을 느꼈던 이삭과 달리 그녀는 그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었다. 단 한 번도 자기 인생에 목적을 생각해보지도 않고, 눈앞에 주어진 해야 할 것들만 눈치껏 해 온 그녀에게 야웨의 말씀은 정말 등불이자 구원의 줄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발적인 순종을 했고, 또 거기에 자기 온 인생을 맡겼다. 에서가 야곱을 섬길 것이라는 말씀을 그녀는 결코 허투루 듣지 않았고, 야곱에게도 누차 그런 이야기를 계속 했던 것이다.

 

*

 

  “형님의 상속권을 저에게 파신다면요.”

 

  여느 때처럼 한 며칠 사냥을 하고 돌아온 에서가 죽을 끓이고 있는 야곱에게 한 그릇 달라고 했다. 정말 여느 때와 같을 수 있는 날이었다. 그러나 야곱의 태도가 전에 없던 단호함을 띠고 있었다.

 

  “?”

 

  천막 앞 울타리에 다리를 걸친 에서는 코웃음을 쳤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야곱은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장자인 형님의 상속권을 저에게 넘기란 말예요.”

 

  후- 에서의 깊은 한숨. 그놈의 죽이 뭐라고. 별 것도 아닌 것에 장자권이야기까지 나오니, 허기진 속에서 무언가 들끓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죽게 생겼는데 그까짓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냔 말이야!”

 

  “맹세하시는 거죠?”

 

  “...”

 

  걸친 발을 내려놓은 에서가 위협적인 얼굴로 야곱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맹세? 맹세라고? 좋아. 이삭의 맏아들, 나 에서는 장자로서의 모든 권리를 야곱에게 넘기기로 한다! 이 맹세는 땅과 하늘과 주님께서 들으셨다! 됐느냐!?”

 

  에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야곱은 그에게 죽을 한 그릇 내밀었다. 신경질적으로 낚아챈 후 속에 털어 넣는 에서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야곱이었다.

 

*

 

  그날 저녁, 에서는 곰곰이 낮의 일을 곱씹었다. 어차피 명분이란 사고 팔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에서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장자권은 아버지 축복이 있어야 상속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왠지 모를 이 꺼림칙함은 뭘까. 덜 익은 무화과 열매를 먹은 것 마냥 뒷맛이 씁쓸했지만, 왜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불현 듯 야웨에 대한 원망이 불쑥 찾아왔다. 야곱이 꾀를 낸 것일까, 아니면 그 상황에 놓이게끔 야웨께서 상황을 만드신 걸까. 중요한 건, 둘 다 불쾌하기 그지없었단 사실이다. 굶어 죽을 것이냐 장자의 명분을 포기 할 것이냐는 상황에 놓인 것에 자기 잘못이 뭐가 있단 말인가.

 

*

 

  야곱은 그 날 있었던 일을 리브가에게 말했다. 리브가는 담담히 반응하려 애썼지만 얼굴에 만연한 웃음을 지울 수 없었다. 기도응답. 그녀에게 이 일은 기도응답이었다. 야곱은 리브가의 표정을 민감하게 잡아냈다. 대놓고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어머니는 좋아하시는 것이 분명했다. 낮에 뱉은 말은 사실 전혀 의도하지 않았기에 조언을 구하려 말을 드렸으나, 그녀는 보고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만 했던 것처럼.

 

*

 

  에서가 신부감을 데리고 왔다. 상대는 헷 족속의 유딧과 바스맛. 이삭이 짐을 꾸리며 다른 때보다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는 이야기했지만, 아예 아내를 데려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이방족속의 여인을. 이건 이삭에게도 좀 충격이었다. 장막에서 한참을 이야기 하던 중 먼저 나온 것은 이삭이었다. 이마에 손을 댄 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이어서 리브가가 뒤따라 나왔다. 그녀는 이삭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으며 위로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속내는 달랐다.

 

  ‘응답이야. 이건 기도응답이야. 장자의 명분을 넘기기로 맹세한 것도 모자라, 이방인과 결혼까지 했어. 에서에게 남은 거라곤 남편이 주는 축복 하나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