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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다/천성글쟁이

소설 야곱 – 2화 속여 넘긴 자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 27:30
 
 
  소설 야곱 – 2화 속여 넘긴 자
 

   에서가 이방 여인과 결혼한 탓일까. 이삭은 그 이후 급격히 쇠약해졌다. 본디 야곱이 장성한 후로는 장막에 거하는 시간이 많아지긴 했지만, 이제는 야곱보다도 더 장막에만 머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누운 채로.
 
*
 
   “얘야.”
 
  꼬박 하루동안 입을 다물었던 그가 내뱉은 말이었다. 사냥의 빈도를 줄이고 장막에서 시시때때로 아비를 보살피던 에서가 그 소리를 민감하게 잡아냈다.
 
   “, 어서 말씀하세요.”
  
   “너도 보다시피 내가 늙어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 너는 사냥할 때 쓰는 화살 통과 활을 메고 들에 나가 사냥을 해다가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정성을 쏟아 너에게 복을 빌어주마.”
 
   “, 아버지. 알겠습니다.”
 
   붉게 충혈 된 눈을 한번 비비고 일어난 에서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가다가, 천막 바로 앞에서 리브가와 마주쳤다. 그러나 잠시 멈춰 인사를 한 후엔 아무 말 없이 활과 화살통으르 메고 말을 몰아 들판으로 나갔다. 잠시 밖에 서서 에서를 보던 리브가는, 에서가 사라지자 급히 야곱의 장막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야곱아.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사냥해다가 별미를 만들어 오라하시면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것을 잡수시고 에서에게 복을 빌어주겠다고 하시더구나. 그러니 야곱아!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거라. 양떼들한테 가서 살찐 염소 새끼 두 마리만 끌어 오너라. 내가 그것으로 아버지 구미에 맞게 잘 요리해 주마.”
 
   “어머니, 하지만…
 
   리브가는 야곱이 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새고 있는 벽 틈을 급하게 메우듯 야곱의 입을 틀어막고 말을 이어갔다. 야곱의 눈은 전에 없이 흔들렸다. 등불을 가까이 해 발갛게 오른 어머니의 얼굴 때문인지, 천막에 비치는 리브가의 그림자가 메스껍도록 일렁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리고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돌아가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해 잡수시게 하거라.”
 
   단호한 리브가의 태도는, 야곱을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었다. 야웨께서 해주신다는데 왜 어머니는 저렇게 애를 쓰시는지, 거짓말까지 해야만 하는 것인지 싶었다. 그러나 이미 달리는 말에 올라탄 것처럼, 무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때 야곱의 속에서 작은 불씨 하나가 지펴졌다.
 
   -그래, 이건 어머니가 시킨 거야.
 
   입술을 질끈 문 야곱이 왼팔을 걷어 보이며 답했다. 떨리던 눈의 초점은 어느 틈에 바로 잡혀있었다. 하지만 총기어린 눈은 아니었다.
 
   “보시다시피 형 에서는 털이 많고 저는 이렇게 털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만져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아버지를 놀리기나 한 것처럼 되어 복은커녕 도리어 저주를 받을 것 아닙니까?”
 
   “아들아,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 어서 가서 염소 새끼나 끌어 오너라.”
 
   대답 대신 일어나 장막 밖으로 나간 야곱은 금방 새끼 염소 두 마리를 끌고 왔다. 리브가는 그 어느 때보다 정성스럽게 조리를 했고, 에서의 옷 중 가장 좋은 것을 꺼내 야곱에게 건넸다. 다부진 에서의 몸에 맞게 만들어진 옷은 야곱에게 조금 헐렁했다. 그러나 그렇게 입혀놓고 보니, 에서인지 야곱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눈앞의 물병도 찾지 못하는 이삭이 구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만전을 기하듯, 어린 염소의 가죽을 야곱의 팔과 목에 감아주는 리브가의 표정이 자못 비장했다. 마치 전쟁터에 아들을 보내는 것처럼.
 
*
 
   “아버지!”
 
   야곱이 짐짓 목소리를 낮추고 이삭을 불렀다. 누워있던 이삭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오냐, 네가 누구냐?”
 
   ‘네가 누구냐?’의 울림이 어느 때와 다른 것은 야곱의 느낌 때문이었을까. 야곱은 마른침을 한번 삼킨 후 답했다. 별미가 담긴 접시를 잡은 그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저는 아버님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아버님 분부대로 요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어서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해다가 만든 요리를 잡수시고 복을 빌어주십시오.”
 
   야곱이 내려놓은 별미의 냄새를 맡던 이삭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에서야! 무슨 수로 이렇게 빨리 잡아왔느냐?”
 
   “아버님의 하느님, 주님께서 짐승을 금방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낚아채듯 답하는 야곱.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서인지 만져보아야겠다.”
 
   다소 힘겹게 몸을 다 일으킨 이삭이 야곱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야곱은 형의 걸음을 흉내내듯 성큼 걸으며 팔을 내밀었다. 그의 팔에 감긴 염소가죽의 털을 잠시 만지던 이삭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말소리는 야곱의 소린데, 손은 에서의 손이구나.”
 
   평생 자신을 지켜준 울타리 같던 아버지의 음성이 오늘처럼 무서웠던 날이 없었다. 야곱의 내면이 전쟁에서 패배한 후 상대편의 호의만을 기다리는 패잔병처럼 요동쳤다. 아득해지는 머릿속을 헤집은 것은 아버지의 물음이었다.
 
   “네가 틀림없는 내 아들 에서냐?”
  
   “, 그렇습니다.”

   입이 제멋대로 달싹이는 것만 같았다. 마음은 조급했으나 목소리는 침착했다. 만일 이삭이 야곱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면, 이 거짓말은 대번에 탄로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즉답을 들은 그의 목소리는 전보다 밝아졌다.
 
   “에서야! 사냥한 것을 이리 가져오너라. 내가 먹고 정성을 쏟아 너에게 복을 빌어주마.”
 
   그렇게 야곱이 가져다 바친 요리와 술을 마신 이삭이 기분좋은 표정으로 배를 두드린 후 말했다.
 
   “에서야, 이리 가까이 와서 나에게 입을 맞추어 다오.”
 
   야곱은 아버지에게 다가가며 일부러 손으로 옷을 몇 차례 비볐다. 그렇게 한다고해서 자기가 덮은 형의 옷에 베인 흙냄새가 더 진해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손을 꽉 쥐며 아버지에게 입을 맞추자 이삭이 그의 어깨에 코를 대고 잔뜩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 내 아들에게서 풍기는 냄새, 주님의 복을 받은 들판의 향기로구나. 주님께서 하늘에 내리신 이슬로 땅이 기름져 오곡이 풍성하고 술이 넘쳐나라. 뭇 백성은 너를 섬기고 뭇 족속들은 네 앞에 엎드리리라. 너는 네 겨레의 영도자가 되어 네 동기들이 네 앞에 엎드리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이삭의 축복을 받은 후 도망치듯 빠져나온 야곱은 장막 밖에서 그만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에서를 마주치고 말았다.
 
   “, 야곱…
 
   에서가 말에서 내리며 야곱을 채 부르기도 전에 이미 사라진 야곱. 고개를 갸웃거린 에서는 아무것도 모른 체 사냥감으로 별미를 만들어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에서의 울부짖는 소리가 장막 밖으로까지 들려왔다.
 
*
 
   그날 이후 이삭 가정의 기류가 달라졌다. 이삭은 더더욱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야곱에 대한 화는 금방 누그러졌으나 생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눈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고, 이따금 눈동자에 맺히는 슬픔만이 간혹 어른거렸다. 야곱은 이삭의 장막에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고, 에서는 사냥의 빈도를 줄이는 대신 장막 주변에서 칼을 갈고 화살촉을 다듬는 시간을 늘렸다. 때때로 리브가가 지나갈 때는 들으란 듯 이정도면 사자의 머리통도 뚫어버리겠죠, 어머니?’하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결국 리브가는 야곱마저 헷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면 안 된다며, 신붓감을 구한다는 핑계로 야곱을 자신의 오빠인 라반이 있는 곳으로 피신시켰다.
 
*
 
   도망치듯 하란 땅으로 가는 내내, 야곱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자기를 위해 평생 분주히 움직이던 어머니의 손은 오히려 그의 등을 떠밀어 고향 밖으로 밀어냈다. 주님의 역사는 모든 상황을 뛰어넘는다면서 항상 그럴만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던 어머니의 삶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을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주님의 축복은 까만 밤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평생을 듣고 자랐으나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하였던 주님의 축복이란 정말로 무엇일까. 주님의 축복을 받아 터를 잡은 고향 땅으로부터 그 어느 때보다 멀리 떨어진 지금 자신의 삶에 축복은 가당치 않다고 생각을 했다.

   “이제 그만 자야지.”
 
   고개를 가로 저은 야곱이 들을 이 없는 말을 중얼거린 후 낙타에서 내렸다. 이내 발길에 채인 돌 하나를 발견했고, 그것을 베개 삼아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
 
   누군가 자신의 이마를 짚는 느낌이 들어 불현 듯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 야곱. 그러나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대신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보이지 않았던 아주 높다란 층계만 보였다.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깔을 뽐내며 반짝이는 층계는 하늘에 닿은 듯 끝없이 뻗어 그 끝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순간 반짝이던 층계가 강렬한 빛을 뿜었고, 잠시간 눈을 감았다 뜬 야곱은 깜짝 놀랐다.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분명히 알아볼 수 없는 형체이지만 알 수 있었다. 눈 앞에 야웨의 사자들이, 그리고 그 위에 야웨가 있었다.
 
   “나는 야웨,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주님이요, 네 아버지 이삭의 주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네 후손은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서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
 
   “, 헉….”
 
   급히 몸을 일으키며 잠에서 깬 야곱은 방금 전 상황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야곱의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아직 날이 다 새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연한 공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이 느낌.
 
   “정말 그 분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그 분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
 
   야곱은 자기가 베고 누운 돌을 석상처럼 세워놓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으며 벧엘이라 부르며 말했다.
 
   “만일 제가 이 길을 가는 동안 당신께서 저와 함께하여주시고 저를 지켜주셔서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주시고,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만 하여주신다면, 저는 당신을 저의 주님으로 모시고, 제가 세운 이 석상을 당신의 집으로 삼겠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그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리겠습니다.”
 
   야곱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드넓은 땅과 수많은 후손들을 주실 분, 항상 자기를 지켜주실 분, 모든 족속에게 은혜를 입히는 조상으로 자기를 세우실 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자기를 지켜주셔야 하고 복 주셔야만 하는 분. 그리고 그럴 때 정말 전심을 다하여 주님으로 모시겠다는 고백. 그러나 야곱이 야웨께 처음 드린 서원의 결은,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 리브가의 그것과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