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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다/말씀묵상

삭개오 일화를 묵상하며 - 1.구원에 대한 단상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깊이 있게 묵상하면서부터 참된 개념과 의미를 알기 위해 애쓴 단어, '구원'.

 

  구원이 단순히 천국행 티켓을 미리 뽑아놓은 예매권에만 한정되지 않음을 어렴풋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서 정확히 무엇인지 그 개념을 잡는데는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말하긴 애매하지만...

 

  그러나 찾는 자는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는 말씀처럼, 갈망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성경을 통해 조명되는 하나님의 지혜 덕에 좀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네, 그렇습니다. 저는 거듭났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단순히 신분의 변화로만 여기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구원선포는 신분상 '하나님 앞의 죄인→하나님의 아들, 자유인'이 된 것과는 조금 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 중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들어 이 구원에 대해 좀 더 풀어보고자 합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하시니 급히 낼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누가복음 19장 2-10절

 

  여지껏 본문을 통한 설교내용은 '구원받은 자의 기쁨이고, 그 증거는 대개 물질을 나누는 것이니 물질 아끼지 말고 헌신하라 구원의 증거를 삭개오처럼 분명히 보여줘라'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삭개오가 네 배나 갚겠고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는 고백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것 보다는, 예수님이 삭개오를 어떻게 다루셨고 그 결과 삭개오가 어떻게 말했고, 그래서 예수님이 무어라 말씀하셨는지를 서사적으로 꿰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선 삭개오가 세리장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세리장은 창녀와 마찬가지로 죄인 취급을 받고, 심하면 열심당[각주:1]에게 매국노라 단죄받아 암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왜 죄인이고 매국노로 취급을 받았나하니, 그것은 세리장의 위치와 잘못된 수익구조 때문입니다.

 

  세리장은 세금을 걷는 사람인데, 그 걷은 세금이 로마 황제에게 바쳐진다는 점에서 식민지였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매국노로 비칠 수 밖에 없었지요. 쉽게 설명해서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당시 민중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일본에 갖다바치는 친일행적을 한 사람입니다. 이방인과의 결탁을 우상숭배로 간주했던 이스라엘 백성입장에서 정말 큰 반역자요, 하나님 앞에 죄인인 셈입니다. 이것만해도 욕 먹을 이유가 충분한데, 세리장의 수익구조가 이상한 것도 큰 문제였습니다. 우선 지금처럼 세리장이 국가공무원이 아니다보니 국가에서 따로 수입을 보장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수입은 오로지 자신이 징수한 돈에서 원래 내야 하는 돈을 제하고 남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리장들이 정직하게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세리장은 생계유지직업이 아니라 사업가들의 청부직이었습니다. 돈이 필요할 때 맡아서 한 행동이니만큼 실제로 매겨야 할 금액보다 얼마나 더 많은 금액을 매겼을까요? 그래서 그는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친구가 있을까요? 마음을 터놓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말입니다.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간다.'고 수군거렸지요. 매국노와 어울릴 자는 매국노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더군다나 키가 작은 자였습니다. 신체적인 컴플렉스가 심하다보니 그것을 가리기 위해 많은 물질을 쌓아두고 높은 지위와 권력을 얻으려고 애를 썼다고 유추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외롭고, 지독히 쓸쓸하고, 그래서 채워지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채우는 이 공허한 자에게 들려오는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가 사는 곳 바깥 언저리에서 구걸이나 하던 맹인거지가 갑자기 눈을 떴고, 그 눈을 뜨게 한 예수라는 사람이 지금 자기 동네를 지나간다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상한게, 로마에서 유학을 한 의사가 아니라 나사렛이라는 촌동네에서 목수일이나 하던 자랍니다. 자신의 이름인 '삭개오(순수하다는 뜻)'와 달리 김철수처럼 흔한 '예수'라니요. 촌동네 찌질이가 어찌 이리도 큰 기적을 행하는지, 왜 이 찌질이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지 그는 정말 궁금했을 겁니다. 혹은 그 전부터도 소식을 들었을 수도 있겠죠. 본문에 점잖게 번역된 '보고자 하되'는 원어로 '열망하다'는 뜻이랍니다. 그냥 '어디 좀 봐볼까?'가 아니라 '와 진짜 보고싶어 죽겠네!'가 더 적확한 뉘앙스지 싶습니다.

 

  나는 키도 작고 보잘 것 없어서 깔보이기 싫으니까 돈이라도 악착같이 모았지만 옆에는 진정한 친구도 하나 없고 외롭고, 그러다보니 그 외로움을 감추기 위해 친구로 지내야 할 동족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순환 속에서 나 자신이 얽매여 고통당하고 있는데 저 자는 도대체 뭐지? 하는 갈망말입니다. 그런데 이 갈망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가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못난점을 가리기 위해 저지른 악행이 자신을 더욱 외로움 속으로 밀어넣는 악순환으로 인해 외로움과 공허함에 허덕이던 자와 함께 먹고 마시겠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정말로 알아보고 싶었고 궁금했던 사람이,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그냥 지나가시다가도 자신을 보시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같이 지내겠다고 말하니까 그게 얼마나 감격이 됬겠습니까?[각주:2] 그는 단박에 내려와서 그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공허함의 악순환으로 밀어넣었던 재물들을 벗어던지겠다 말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구원의 증거는 물질에서 자유해지는 것이다-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삭개오가 물질을 나누고 갚겠다고 한 것은, 자신을 채워주리라 여겼던 것이지만 사실은 자기를 더 억누르고 공허하게 만드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대신할 게 도무지 무엇인지 몰라 울며 겨자먹기로 쥐고 있었던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자유의 외침입니다. 삭개오에게는 그게 '부당하게 징수한 세금'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필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셨습니다. 그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꿰뚫어보셨습니다. 부자동네인 여리고를 그냥 지나가시면서 매국노이자 편법을 쓴 삭개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지 않으면 네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잘못을 지적하기 이전에 예수님은 그 사람 속깊은 상처를 보고 그것을 감싸주셨습니다. 이른바 햇볕정책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요? 네, '성경에 써~있네~♪'

 

  그런데 이 삭개오의 고백 뒤에 예수님이 구원을 선포하셨는데, 뭔가 사족을 단 느낌이 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라는 말에 주목해주십시오. 구원이 이르렀는데 언제요? 오늘 이르렀답니다. 큰일났습니다. 자신을 억누르던 것에서부터 해방되고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려고 했는데 오늘 구원이 임해서 이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걸 큰일이라고 말하면 더 큰일입니다. 천국을 사모하지 않는 것 같거든요. 삭개오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오금이 저려왔을까요? 아뇨, 여러분 아시다시피 삭개오가 그러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했다(구원받았다와 달리 구원이 삭개오에게 다가왔다는 말입니다. 예약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는 말이 '오늘이야말로 이 집 사람들이 죽어서 천국가는 날이다.'고 줄초상을 선포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뭘까요? 이미 앞 문단에 나와있습니다. 자신을 억누르던 것에서부터 해방되고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타력구원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절대타자(絶對他者)인 신에게서 오는, 그러니까 우리 밖에서(extra nos), 우리를 위해서(pro nobis) 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가장 크게는 하나님과 끊어져 죽을 수 밖에 없고 실제로도 하루하루 죽어가는 우리의 운명을 벗겨주고 영생(영구불변히 산다는 의미로만 해석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후인 죽음에 반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일종의 '신인동형어'기 때문입니다.)을 주시는 것이고, 개별적으로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깊은 문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소 지나치게 구원의 의미를 추상적으로, 아직 우리와 상관이 없는 영역의 것으로 돌려놓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를 감싸 채워주셨기 때문에 자신을 억누르지만 대안이 없어 포기할 수 없었던 재물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고, 그로인한 자유가 그에게 있어 '지금 임한 구원'이 된 것입니다. 이런 흔적들은 혈루병 여인을 고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고 성경 역시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았'다고 기록한 점(마 9:22), 광풍이 몰아치자 살려달라고 외친 게 아니라 '구원하소서'라고 외친 제자들(마8:25),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렸던 자를 축사하신 후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지 수군거린 점(눅8:36) 등 복음서에 많이 언급이 되어있습니다. 더 궁금하시다면 복음서 내 예수님이 치유하시고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회복시키셔서 삶이 즉각적으로 달라진 이들에게 예수님이 무어라고 선포하셨는지 직접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제 초점을 우리에게 돌려봐야겠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소위 신분상 변화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정말 우리를 억누르던 것이 무엇이며 우리는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까? 내 삶에서 내가 놓칠 수 없다고 여기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내게 해가 될 부분, 내가 받은 상처와 거절감정으로 인해 모난 영역들은 예수님과, 또 나의 교회 공동체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습니까?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우리는 반쪽짜리 구원을 가진 셈입니다. 심지어 '가졌다'는 말도 어폐가 되겠지요. 아주 나중에야만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방전도를 하시는 분들이 흘리고 다니시는 메시지가 바로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천국가세요.'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삭개오가 재물 다 바치고 구원받았으니 우리도 무소유의 정신을 실천하여 구원의 증거를 보이자. 은혜에 감격한다면 그러자'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삭개오 당시 천국, 지옥 개념이 지금 우리같지도 않던 사람들이 들으면 놀랄 소리입니다. 이런 말들을 듣자면 지금 이 땅에서 크리스찬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독히 괴로운 기다림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분명 '아직'이기는 하지만 '이미' 우리에게 주어지기도 한 점도 중요하게 생각해야합니다.

 

  구원을 천국가는 티켓으로 만들어버리면, 우리 삶의 모습은 치열함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을 값싸게 이용해먹는 자가 됩니다. 죄 지어도 교회와서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내가 이미 구원받았으니, 설교말씀이 뭐 어떻고 내 마음에 불현듯 떠오르는 말씀이 어떻고 양심의 가책이나 일반 도덕가치고 뭐고 그냥 회개기도만 하면 되는 겁니다. 안티 크리스찬들이 주 공격수단으로 거론하는 값싼 대속론은 우리의 이런 구원에 대한 몰이해가 빚어내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이 삭개오 일화를 통해 예수님앞에서 자신을 억누르던 것을 다 내어놓겠다는 삭개오의 고백을 이끌어 낸 예수님의 행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치유를 행하시고, 누군가에게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을 보이시고, 누군가에게는 이혼녀라는 편견의 벽을 뛰어넘어주시고, 오늘 이 외로움과 공허함에서 허덕이는 삭개오에게 먼저 다가가 친구가 되어주시는 그 분의 '찾아오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자유를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포 자체가 어떤 힘블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선포를 하게 만드는 예수님의 은혜(힘)를 경험함에 따라 자연스레 나오는 결과요, 왕의 대로를 예비할 그 분의 깃발일 것입니다.

 

※본래는 구원에 대한 의미보다도 삭개오에게 다가가신 예수님의 태도를 통한, 연약한 자를 위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 쓰려고 했는데 글이 이렇게 되었네요. 두 번에 걸쳐 써보겠습니다. :)

  

 

  1. 1)우리나라로 따지면 '독립군'과 비슷한 존재입니다. 로마의 지배로부터 무력을 통한 해방을 꿈꾸는 열성 민족주의자들이었죠. 로마에 결탁한 동족들을 납치해서 목을 자르는 등 과격한 면모도 보였습니다. 이들은 언제나 거사를 치루기 위해 속에 단도를 품고 있었다네요. 실제로 제1차 로마반란의 주동세력이었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2. 2) 학생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모 학생은, 평소 참 외로움을 많이 탔는데 한 친구가 까똑에서 '우리 친하게 지내자'라는 말 한마디에 감격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삭개오가 오버한 게 아니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