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유행하던 사조인 영지주의자들에게, 위 선언은 참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구절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신성 그 자체이신 예수님은 만물의 시작부터 계셨다고. 십자가에서 육신을 벗고 완전해지신 예수 님께 어울리는 설명이지!' 그러나 사실 요한복음엔 '영지주의자들의 언어로 영지주의를 논파'하는 고도의 돌려까기가 담겨있다. 그들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해주어 그들이 잘못 인식하고 있는 점을 꼬집어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들에게 있어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말씀'과 '육신'이 하나가 되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읽던 영지주의자 들은 그제서야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을 것이다. -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여러 신학자들이 그들만의 프레임으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지만 나 역시 거기에 숟가락을 얹어보자면,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언뜻 맞아보였다가 점점 차이가 나며, 그 사이에서 역정을 내는 인간과 그를 조율하시는 하나님을 자주 볼 수 있다. 히브리인의 신분으로 이집트의 왕자의 삶을 살았던 모세가, 자기 민족을 핍박하는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서로다투는 동족들을 말릴 때만 하더라도 이것이 자신이 이집트 왕자로 부르심 받은 마땅한 목적이며 아귀 가 맞는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뒤로부터 40년 동안 광야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야 참된 출애 굽의 지도자로 서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에게 단단히 마음 상한 모세가 보이는 반응에 씁쓸한 웃음 이 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난을 잘 견디다가, 건강과 재산과 가족까지 모두 잃은 후 하나님께 역정을 내던 욥 은 어떤가. 갈수록 '어, 이거 뭔가 좀 잘못되어가는데?'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며, 결국 하나님이 자신의 끝까지 다 털어가실 때 느꼈을 비참함과 허무함을 우리는 감히 짐작키 힘들 것이다.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 뒤 만사형통할 줄 알았던 엘리야의 삶은 어땠는가. 그로 인 해 생명을 위협받아 서울에서 부산쯤 되는 거리까지 부리나케 도망쳐 로뎀나무 아래에서 차라리 자신을 죽 여달라고 말했을 때 겪었을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약시대를 연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도 그와 같았다. 정치적 메시아를 원했던 대중들에게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힌 실패한 선지자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포로기를 반면교사삼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다시 중심에 놓고 온갖 율법을 지켜온 바리새인들에게 쌍욕을 퍼부으셨다. 해방된 이스라엘에서 한자리씩 차지 하고 싶었던 제자들에게는 그 나라 그 이름 때문에 순교하는 사도의 길을 열어보이셨다. - 그런데 이것이 비단 2000년 전 그들만의 문제일까.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이 나의 단추를 잘못 꿰는 것에 난감함을 표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가. '아니,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저를 축복해주시려는 것 아니었어요?' '이 일을 해결해주시려는 게 하나님의 뜻 아니었나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결단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과 일치할 수 없음을 우리는 머리로는 잘 안다. 설교때마다 그런 류의 이야기가 나오면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멘-하고 진심을 눌러담아 고백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우리 일상에서 벌어질 때면, 어김없이 저런 태도를 보인다. 마치 이런 일은 처음인 듯. 유사 이래 거의 한결같은 인간의 태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이라도 '아 다 때려쳐 똥멍청이들아!' 하고역정을 내시고 (컴퓨터 전원을 끄듯)우주심판 버튼을 꾹 누르셔도 할 말이 없다. 왜, 그래서 한때 선풍 적 인기를 끌었던 짤방의 글귀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아니었던가. 그 유구한 흐름 속에 나와 너는 우리 함께 하나되어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나는 지금 그런 우리의 태도 자체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의 예측 범주를 아득히 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우리의 기대감을 딱 충족시키는 하나님이시라면 유일신의 자격 이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나의 기대와 같을 것이라는 기대를 얼른버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기 이전에, 나태하고 게으르며 틈만 나면 꼼수를 부리려는 내 영혼에게 선사하는 채찍이기도 하다. 2 년 전 추수감사주일에서 청년부행사로 보였던 페인팅 드라마 God is God의 대략적 메시지 역시 위와 같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그리시는 그림의 일면만 보게 된 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 하나님과인간의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보여주는 절망의 메시지가 될 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우리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와야 한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말씀과 육신이 아예 하나가 되어 버렸다.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을 주었겠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의 메시지다.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 로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피조물인 인간을, 너와 나를 필요로하시겠다는 파격의 메시지이기 때문 이다. 단순히 우리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함을 버리고 불완전함을 택하신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의 간극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그가 오셔서 우리를 그와 같이 세워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 연결고리는 더욱 공고해진다. 이미 완성되었으나 아직 우리가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 사실 하루하루 일상에 치 이는 우리들에게 있어 이토록 친근하면서도 실감나지 않는 말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어색한 모순형용 (친근하면서도 실감나지 않음)을 극복하기 위해 때론 과도한 봉사를 하거나, 특정 은사에 지나치게 집착하 거나, 드라마같은 간증을 만들어내려고 혈안이 된다. (물론 봉사, 은사, 드라마같은 간증은 우리 삶에 유익이 되는 것들이다. 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하지만 우리 일상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인정하며 끈질기게 기다리는 것,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 만 온전함 그 자체인 또 하나의 모순형용을 빚어내는 것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과 나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루 는 방법이 꼭 내가 원하는 방향만은 아닌 것을 깨닫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축복이다. 성경과 그 성경을 연 구한 모든 신학자들이 입을 모아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결코 우리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분이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껏 산소로 호흡할 수 있다고해서 산소를 업신 여기는것이 옳은 태도가 아닌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그 자체가 아무리 단 순해보여도 결코 그 사실을 업신여길 수 없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요즘 그 필요성만큼 은 절실히 깨닫고 있는 C.S 루이스의 말을 덧붙이며 글을마무리한다. "비전을 사라고, 비전을 판다고 사방에서 난리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루하루 정당한 소득을 위해 일할 사람, 뇌물을 거절할 사람, 없는 사실을 지어내지 않을 사람, 자기 일에 숙달한 사람이 아쉽습니다." |
'살아내다 >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상수훈-예수의 저항에서 야기된 모순에 대한 단상 (0) | 2018.01.09 |
---|---|
사무엘서 묵상 (0) | 2017.12.11 |
삭개오 일화를 묵상하며 - 2.내면화된 영성, 멀어지는 용납 (0) | 2014.02.06 |
삭개오 일화를 묵상하며 - 1.구원에 대한 단상 (0) | 2014.02.02 |
전도서 3:1~15절. (3) | 2012.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