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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다/하루

흑백논리가 야기하는 확률오류

우리는 흔히 "성공 아니면 실패니까 확률상 50%잖아. 용기내서 해 봐!"라는 식의 말을 아무렇지않게 하고 또 듣는다. 들을 때마다 묘한 위로가 되고, 마땅한 위로가 떠오르지 않을 때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뭔가 틀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러다 오늘 문득 깨달음이 왔다. 결과의 경우가 두가지 수라고해서 각 결과에 이를 확률이 공평하게 반반일 수는 없다는 것. 이걸 논리쩌는 사람들은 뭐라고 명명을 할텐데 마땅한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네. 결과의 수와 과정의 수? 방법의 수? 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어렵네.

풀어보자면 이렇다. 다음과 같은 동그란 룰렛이 있다.

 



이 경우 룰렛을 돌리면 얻는 결과는 파랑아니면 빨강, 즉 두 경우 뿐이다. 그러나 빨간 영역보다 파란 영역이 월등히 많기 때문에 빨강에 걸릴 확률과 파랑에 걸릴 확률은 당연히 다르다. 룰렛을 돌려서 어차피 빨강과 파랑 둘 중 하나니까 빨강에 걸릴 확률이 50%일 수 없듯, 일의 성패도 결과를 불러오는 여러가지 요인과 과정이 있기 때문에 성공 아니면 실패니까 어차피 50%확률이잖아-라는 말의 경우 지나친 결과론인 셈이다.

 

 

[여기서부턴 뱀발]


이걸 좀 더 논리적으로 간결하게 가다듬은 사람이 누군가는 있겠지. 이런 생각하니까 좀 답답하다. 중학교 2학년 시절 이타심에 관해 고뇌하다가 결국 '이타심도 보람을 느끼기 위한 자기만족의 발로'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알고보니 도스토예프스키인가? 톨스토이인가 어느 문학가가 이미 작품 속에서 녹여낸 주제라고 하더라. ㅋㅋㅋㅋ 생각해보면 이런 깨달음이 한 둘이 아니었는데, 그때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났나-싶었다.

 

그런데 또 한 편 생각해보니, 그사람보다 앞선 시대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귀족으로 태어난 게 아닌 이상 그런 깨달음을 얻은들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고, 벨과 무치의 경우를 보더라도 타이밍을 비롯해 외부 환경이라는 변수가 많기 때문에 그 이름 대신에 내가 들어갈 수 있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는 생각이, 인문학과 형이상학에 대한 고민과 사유가 별다른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 시대에서 나의 재능이 좀 잉여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반드시 이를 발휘할 기회가 오겠지. 결국 형이상학에 대한 사유는 인간과 삶의 원리이고, 이 원리가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며, 패러다임의 전환은 시대를 바꾸는 나비효과가 되니까. ㅋㅋㅋ뱀 몸통보다 발이 더 길어서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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