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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다/하루

강의를 하다가

가르침에대한 나의 은사와 적성일치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있다. 물론 이 점이 "완벽"을 뜻하지는 않지만.

오늘 중3들을 가르치다가 독서습관에대해 이야기를 한 점이 불현듯 떠오른다. 마침 성장소설의 대가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다루다보니 가르침의 습관과 나의 성장과정을 자연스레 묶게된다.

머리로 아는 영역들을 풀어놓는 게 쉽지않다. 부지중 내뱉는 말들과 온갖 반언어, 비언어적 표현들은 내 머리와 몸의 거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간곡하게 말한 것이 혹시 고압적으로 들리지는 않았을지, 빠른 말과 큰 소리가 습관을 넘어 모종의 억압이 되지는 않았을지, 하지말라보다 이런건 어떨까?라고 대안제시를 하는 것이 얼마나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는지 등등...

나 자신의 스승은 나다!-라고, 언뜻 들으면 크리스찬이 할 말이 아닌듯한 말을 한 적이 있다. 10대 중후반부터 그리 여겼고 스물 셋에 즈음하여 글로 남겨두었으니 꽤 오래된 생각이다. 아버지의 부재나 귄위적인 리더에대한 반발심 등 온갖것들이 얽혀있지만, 여하튼 나는 항상 반성적사고를 통해 나를 점검하고 스스로 대안을 제시하며 싸워가는 치열함에 익숙하다. 좀 더 크리스찬스러이 말하자면 하나님이 주신 사유의 은사를 반성적사고로 잘 사용한다-가 되겠다.

그런데 문득 오늘 이런 내 모습에 대한 무게를 느꼈다. 아니 차라리 모종의 두려움을 느꼈다고 표헌하련다. 나의 스승은 나라는 자각 당시는 물론 글로 옮긴 때에도 그런 내 모습, 상황에대한 얼마정도의 뿌듯함이나 교만이 숨어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가정의 가장이 되고, 가르치는 입장이 되고 또 무언가를 더더욱 책임져야되니까 별 수 없이 스스로 서는 이 순간들이 많아진다. 나 자신이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고, 직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서 순간순간 선택들이 그다지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처참하게 깨닫는 순간들이 많아지는 것도 두려움의 중요한 이유이리라.

좋은 친구들이 있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것이 참 다행이다. 또한 나의 나됨을 날마다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이 모든 것의 궁극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셔서 다행이다. 그냥하는 말이 아니라 눈물날 만큼. 그래서 내 인생의 스승은 나이면서도 깊은 외로움에 잠식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만 덧붙이자면, 결국-의 영역에서 이뤄질 완전함을 안다하더라도 지금 여기의 고통이 경감되지도 않고, 당하는 그 순간에는 마치 그걸 믿지않는듯 괴로워하는 것은 똑같다. 다만 그 순간들은 지난 후 내 삶의 어떤 의미로 새기고 또 밑거름으로 품을지 똥으로 처리할지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서 조금이나마 맷집도 생겨나고... 여하튼 고통이 없는 것은 확실히 지금 우리한테 허락된 영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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