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를 들어 한가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사복음서 중 단 한군데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른바 '성전청결사건'입니다.
각 복음서마다 조금씩 말은 다르지만, 대체로 하고자하는 메시지는 '기도하는 성전에서 장사나 하다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타락한 대제사장들의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를 꾸짖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더 나아가보면 물질만능주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습니다. 분명 가슴깊이 와닿는 이야기이며, 좋은 교훈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새겨야 할 점이고 살아가야 할 바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성경공부를 하던 중 간사님에게 이 구절 속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장사를 하던 곳은 단순히 성전의 어느 장소가 아니라, 소위 '이방인의 뜰'이라는 아주 특별한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이라고 해서 그것을 성전 전체로 확대해석한 제 어리석음이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이었죠.
각설하고, 이 '이방인의 뜰'은 성전출입이 금지되었던 이방인들이 유일하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선민의식으로인한 배타성에 젖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 이 이방인의 뜰은 율법만 아니었으면 없애고 싶은 자리였거나, 자신들의 우월감('선택받지 못한 너희에게 베푸는 은혜니라'정도의?)을 확인할 장소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뜰은 지금으로 따지면 100평 정도나 되는 대 부지였다고 합니다. 뜰이라기엔..너무 크죠? 이런 자리를 이방인들 따위가 기도하게끔 방치해두는 것은 영 마뜩찮았을 것입니다.
초점을 잠시 옮겨보겠습니다. 이 성전에서는 제물로 쓰일 여러 동물들을 파는 상행위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이 이 곳을 뒤엎고 화를 냈던 사건을 먼저 접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쉽게 생각하겠지만, 상황을 조금만 생각해보자면 꼭 잘못이라고 하기도 애매합니다. 보통 성전으로 와서 번제를 드리려는 백성들은 각자 처소에서 양과 비둘기 등등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거리가 가깝든 멀든, 당시 도로가 지금처럼 아스팔트로 쫙 도배된 것도 아니고 승차감이 좋은 고급 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만큼 이런 제물들을 데리고 오는 도중 '흠'이 생기는 경우가 다반사였을 것입니다. 흠없이 정결한 것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데, 데리고 오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이 부상 등 각종 '흠'들 때문에 먼길 와놓고 예배를 못 드리면 안 될 일이지요. 그러다보니 이런 자들을 위해 성전 근처에서 흠없는 정결한 제물들을 팔아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해마다 이 성전을 방문하는 이스라엘인들은 약 백오십만에서 이백만이라고 합니다. 안식일을 제외하고서라도 하루에 약 5천~7천명 정도가 들릴정도로 터가 좋은 곳이지요. 이정도 되는 인원들 중 절반이 제물을 필요로 한다 치더라도 하루 이천오백 명이 상거래할만한 공간은 결코 작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 성전 근처에 적당한 공간이 있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아, 그러고보니 저 헤묵은 이방인의 뜰이 있었네요. 제사장들의 머리는 빠릿빠릿하게 돌아갑니다. 저 넓은 땅을 우리 백성들이 좀 더 정결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게 쓸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절기와 제사 및 율법을 제대로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임을 더욱 깨달아가려고 한 치 오차도 없이 노력하는 이 열심있는 제사장들은 사명감에 불탔을 것입니다.
네, 뭐 어떻게 되었는지는 '성경에 써~ 있네~♬'.
예수님이 진짜로 이 성전청결을 통해 보여주고자하신 의도 중에서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모든 민족과 열방에게 복이 되어라 말씀하신 그 명령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이스라엘인들을 대신해 당신이 직접 피와 살로 가르치신 점입니다. 단순히 기도해야 할 성전이 강도의 굴혈로 바뀐 것을 넘어,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만나러 올 수 있는 공간을 자칭 하나님의 백성들의 편의를 위해 빼앗은 것을 도저히 참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서론이었습니다. 깁니까? 심호흡 한 번 하고, 몸 조금 풀고 기지개 켠 다음에 다시 읽어갑시다.
며칠 전 제 아들순장을 만났습니다. 각자 바쁘게 살다가 오랜만에 만나서 여러 이야기들을 정신없이 쏟아내다가, 좀 지난 이야기인 레이디가가사건까지 이야기가 번졌습니다. 본래 그런 이야기를 하기보다 문화사역에 관한 의견을 나누다가 슬몃 번진 건데요,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이 친구와는 처음 나누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일전에 제가 올렸던 이야기를 추려서 나누었죠. 그러면서 문득 저 사건이 생각났고, 어쩌면 저 사건은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도 비슷하게 자행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전에 제가 레이디가가를 대하는 한국교회의 태도가 매우 편협하다고 지적했었습니다. 드러나는 사건 외에 드러나지 않게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부분에서는 교묘하게 침묵하고, 저렇게 보이는 곳에서만 영적인 문제를 뒤집어씌워 종교폭력을 행사하는 그 모습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한가지 더 짚었던 부분도 있죠. 바로, 저런 공연에 대한 기독교적인 대안문화가 얼마나 있느냔 것입니다. 한창 놀러다니기 좋아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에게 성경공부니 제자훈련이니 전도훈련이니 이런 것들로만 에너지를 펼치게끔 하는 것은 좀 잔인해보이기까지 합니다. 아, 물론 제가 저런 경건훈련들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저건 모든 크리스찬들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만 인간을 지은,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집단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고작 이거 밖에 되지 않는 부분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만큼의 가치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지 영으로만 구성되어있진 않습니다. 엄연히 육,혼,영을 지닌 존재입니다. 육과 혼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일진정 영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지도 않단 말입니다. 때론 육에 속한 부분을 영으로만 대처하려는 시도들이 얼마나 크리스찬들을 피곤하게 하는 지요. 아무리 이 육, 혼, 영은 뗄 수 없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서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란 것도 분명 있습니다. 하나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배가 고픕니다. 지금이 밤 아홉시 좀 넘었는데요, 제가 배고픈 이유는 점심을 두유와 바나나로 조금 떼운 것 때문일까요 아니면 영적인 갈급함이거나 혹 어떤 영적인 메시지가 있어서 일까요? 혹시 여러분은 제게 '배고픔의 영'이 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각설, 기독교문화는 꽤 많이 발전해왔습니다. 수준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영역에서 크리스찬들의 접근성이 높아지기도 했지요. 대안문화공간등이 생겨나기도 했고, 대규모 콘서트(에배말고요)도 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합니다. 청년들은 해뜨는데부터 해지는데까지를 찬양해도 그저 박수만 치며 부르지 않습니다. 방방 뛰고 싶고 춤이라도 추고 싶습니다. 이런 청년들이 감성주점을 가고 클럽에 가는 것을 경건훈련으로만 대체하려하고 세상과 타협한다는 명목 하에 억누르는 것은 좀 슬픈 일입니다. 마치 엄연히 허락된 이방인의 뜰을 잘 가꿀 생각은 않고 제물을 파는 시장으로 대체하는 것 같습니다. 이방인문화 같이 낯설고 경계해야 할 것들이지만 엄연히 허락된 것이며, 넓게 보면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삶의 양식이 이런 편협한 구분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아들순장이 말해줬습니다. 배송희목사님이 이끄는 워십팀이 있는데, 예배를 클럽에서 드린다고 합니다. 비트가 강렬한 음악을 틀고 춤을 추면서 랩을 하면서요. 낯설고 어색하죠? 좀 덜 경건해보이고 하나님께 실례인 것 같습니까? 삼십년 전 강대상에서 기타를 들었을 때만해도 사탄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드럼을 치는 것은 아직도 일부 보수적인 장로교회에선 허용되지 않는다고 하고요. 글쎄, 누구보기에 좋지 않을 것일까요?
문화의 주도권을 되찾아와야한다거나, 빼앗긴 문화를 정복해야한다는 그런 폭력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부분들, 혹은 그정도를 넘어 책임지고 가꿔야 할 부분마저도 외면한 채 종교성에 얽매여 있는 부분이 혹시 우리 삶에는 없을까요? 아직까지 한국교회가 지닌 청년들에 대한 이해, 나아가 사람에 대한 이해는 좁은 것 같습니다. 변화의 움직임이 보인다고 하지만, 기독교문화 자체가 거의 없는 이 부산땅에서는 참으로 요원하게만 느껴집니다. 언제부터 기독교는 고리타분해졌을까요? 언제부터 우리끼리만 적당히 누리는 데 문화를 소비하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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