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는 이름과 달리 주인공이 사무엘이 아니라 다윗과 그의 동료들이다. 사무엘상은 31장, 하(이하 삼하)는 24장인데 사무엘은 고작 사무엘상(이하 삼상) 8장만에 이스라엘 통치를 마치고 늙어서 퇴임하게 된다. 심지어 그가 통치를 시작하는 것은 삼상7장이고, 그나마도 초반부 블레셋을 물리친 후 살아있는 동안 블레셋이 쳐들어오지 못했다는 언급 뒤에 바로 8장으로 넘어가 다 늙었다는 말로 끝난다.
사무엘이 어떤 과정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어떠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이상하리만치 사무엘의 통치와 다스림에 말을 아낀다. 이후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며, 다윗에게는 기름을 부은 후 24장에 이르러 죽었다는 언급을 끝으로 성경 무대에서 퇴장을 한다. 그는 사사시대의 끝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왕정시대를 잇는 교두보로 보인다.
사무엘은 죽었으나, 그가 기름 부은 다윗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사무엘서가 끝난 후 다윗서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삼상-삼하로 이어지는 특이한 구조를 보인다.
우리 삶에서 사무엘의 삶이 축복으로 부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내 인생의 무대에서 주연은 나여야 한다. ‘-여야 한다’는 당위도 없이 당연히 나라는 인식을 하고 살아간다. 사춘기 시절 누구나 겪는 ‘극장의 우상(나는 죽지 않을 것이고, 불행한 일은 나를 피해갈 것이라는 환상)’이 끝나도 그렇다. 삶의 많은 불행을 견디는 이유 그 기저엔 속칭 ‘쥐구멍에도 볕 뜰 날이 있겠지.’하는 기대감이다. 드라마에서 결국 막판 뒤집기로 행복해지는 주인공을 나에게 대입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고백들을 호흡처럼 내뱉곤 한다. 그리고 그 말의 무게감을 덜어내기 위해 항상 앞뒤 맥락을 첨가한다.
‘전능하신 주인님! 내 삶에 내 역량 이상의 축복을 부어주시고, 저에게 좋은 길을 알려주세요. 그 좋은 길이 옳은 길처럼 보이도록 포장하는 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이라던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의 선포에는 항상 하나님이 내 신앙 카트에 부스터 붙여 주시리라는 기대감으로 마침표를 찍어본다.
그러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살아생전 자기 민족에게 평생 멸시를 당하였고, 그렇게 닮기 원하는 ‘구령의 열정이 뛰어난 사도들’의 삶은 거의 대부분이 순교로 끝난다.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고자 온 수많은 선교사들과 그의 자녀들이 허무하게 죽은 자리는 Unmarked라는 작은 묘비로만 간신히 기억되며, 그마저 기억되지 못하는 이들도 있으리라.
그들의 삶에서 그들은 축복받고 막판 뒤집기로 잘 사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불행을 겪은 주인공은커녕 주인공이지도 못했다. 우리는 이 명백한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그들의 삶이 내 삶이 되거나 혹은 내 삶이 그들의 삶이라는 범주에 속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교훈과 깨달음을 주는 절대적 타자(他者)로 여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힘듦은 기도로 이겨내야 하거나 꾸짖고 극복해야 할 하나의 시험으로 바라보게끔 훈련받아왔다. 타인이 고난의 동전을 넣고 버튼 하나를 누르면 음료 하나 뽑아내듯 축복과 위로를 건넨다.
나는 24살 캠퍼스 복학 전에, 내 복학 후 선교단체의 활동이 사무엘과 같을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복학 직전 동기들과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복학한 해의 대표단 임명 직전에 다시 한 번 이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내 삶을 관통하는 메시지라면? 나의 삶이지만 내가 주인공이 아닌 삶이라면? 단순히 그게 ‘나는 죽고 예수가 사는 삶’같은 거의 허구나 다름없는 슬로건이 아니라 정말 질척한 어둠과 까실까실한 고난의 길, 영원히 차가운 비주류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야한다면? 너무도 받아들이기 무섭고, 정말로 그 잔을 내게서 치워달라는 고백을 드린 예수의 심정이 이해가 될 지경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내 삶을 그렇게 다루신다면, 나는 어떻게 이를 받아들여야할까. 12년 전 신앙생활을 시작하며 읽은 말씀 중 제일 용납이 안 되던 말씀이 이제야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이런 나 자신이 너무 싫다 ㅎㅎ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다른 하나는 막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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