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무리에게 “누가 네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 대며…”(마5:40절)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과 3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그는 잡혀온 자신을 때리는 자에게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어디 증거를 대 봐라. 그런데 내가 한 말이 옳으면, 왜 나를 때리느냐?”라고 항변(요18:22-23)을 하셨다. (좀 불경스럽게 여기실 진 모르겠지만) 성경에서 흔히 보이는 모순 중 하나이다.
사실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는 것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한 부분들로 가득하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지 않나, 형제 자매에게 ‘바보’라는 욕만 해도 지옥에 던져진다지 않나, 손으로 죄 지었으면 손 자르라지 않나…. 단순히 도덕적으로 완전한 무결점을 원하시는 걸 넘어서서, 구원론까지 건드리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그럼 그 뒤에 형제 자매에게 욕하면 어디감?’같은 질문.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있었는데, 내가 주목한 것은 월터 윙크의 해석이다. 그는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말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며 가르친 교훈들(마5:38-42)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듯 ‘정당방위마저 포기한 채 극단적인 무저항을 행사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말이다.
첫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왼손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상대의 왼뺨을 때리려면 손바닥으로, 오른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손등으로 상대를 때린다는 것은 노예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대등한 관계에서 이런 짓을 하면 법정으로 끌려가 1년치 연봉을 훌쩍 넘는 금액을 배상해야 할 만큼 모욕적인 행위로 간주되곤 했다. 즉, 내가 오른뺨을 맞았다는 건 상대가 나를 벌레 취급했다는 뜻이다. 이 때 왼뺨을 대라는 말은, ‘나도 인격적인 존재다. 때리려면 그걸 인정하고 다시 때려라.’라는 소극적 저항이 되는 셈이다.
둘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속국이었는데, 로마 군법에는 ‘민간인을 동원할 때 5리를 넘을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다. 상대가 5리를 가자고 할 때 그 2배인 10리를 가자고 하면 상대에게 군법을 어기라는 소리가 되는 셈이다. 즉,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같이 가라는 말은 그러면 안 되는 군법을 들어 저항하라는 이야기가 된다.
셋째, 당시 로마의 말도 안 되는 세금 때문에 채무자가 굉장히 많았는데, 이때 저당 잡히는 것이 주로 겉옷이었다. 문제는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줘라’하면 ‘벼룩의 간을 빼먹냐 이 나쁜 자식들아’라는 반항의 의미로 간편하게 해석을 할 수 있는데, 성경은 반대로 말하는 점이다. 이걸 고의적으로 비틀어놓은 풍자적 말씀으로 해석하여도 저항의 의미는 그대로인데, 문학적 장치로 설득력을 맞바꾸려는 시도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별로다. 좀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재판으로 속옷까지 빼앗길 위험에 처했으면 이미 볼 장을 다 본 셈이다. 재산은 물론 소위 저당 잡힌 그 겉옷까지 빼앗긴 상태일 확률이 높기 때문에 속옷 달라는 채권자 하나에만 ‘다 가져라 이 나쁜놈아!’라고 말하라는 의미로 보긴 어렵다. 즉, 이는 주로 저당잡히곤 했던 겉옷을 빼앗아 간 자(채권자)와, 치부를 가리는 마지막 의복인 속옷마저 가져가는 구조적 착취(로마제국) 둘 다 비판한 셈이 된다.
겉옷과 속옷에 관한 문화적 이야기는 사실 더 할 게 많은데, 이 이상 길어지면 사족이 너무 긴 것 같아서 감히 생략.
위 세 가지 근거를 통한 해석은 예수의 가르침의 결을 바꿔준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무저항이 아니다!)이나 우리나라의 촛불혁명이 이 가르침에 적합한 것 같다. 문제는 이렇게 볼 때에도 여전히 42절의 해석은 난해한 상태로 남게 된다. 여지없이 ‘달라는 사람한테 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산상수훈 내용을 저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의 언행에서 발생한 모순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면서도, 산상수훈에서 말하려는 ‘바리새인들의 도덕적 의로움보다 더욱 수준 높은 의로움을 너네가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는 적절한 자세라고 생각된다. 결국 바리새인들 지키는 것보다 더 철저하고 엄격하게 지키라는 게 아니라, 단순히 엄격한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거나, 그들이 지키는 모세 당시의 율법이 담지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인식을 깨버리는 건 마찬가지이니까.
사실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는 것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한 부분들로 가득하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지 않나, 형제 자매에게 ‘바보’라는 욕만 해도 지옥에 던져진다지 않나, 손으로 죄 지었으면 손 자르라지 않나…. 단순히 도덕적으로 완전한 무결점을 원하시는 걸 넘어서서, 구원론까지 건드리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그럼 그 뒤에 형제 자매에게 욕하면 어디감?’같은 질문.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있었는데, 내가 주목한 것은 월터 윙크의 해석이다. 그는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말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며 가르친 교훈들(마5:38-42)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듯 ‘정당방위마저 포기한 채 극단적인 무저항을 행사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말이다.
첫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왼손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상대의 왼뺨을 때리려면 손바닥으로, 오른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손등으로 상대를 때린다는 것은 노예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대등한 관계에서 이런 짓을 하면 법정으로 끌려가 1년치 연봉을 훌쩍 넘는 금액을 배상해야 할 만큼 모욕적인 행위로 간주되곤 했다. 즉, 내가 오른뺨을 맞았다는 건 상대가 나를 벌레 취급했다는 뜻이다. 이 때 왼뺨을 대라는 말은, ‘나도 인격적인 존재다. 때리려면 그걸 인정하고 다시 때려라.’라는 소극적 저항이 되는 셈이다.
둘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속국이었는데, 로마 군법에는 ‘민간인을 동원할 때 5리를 넘을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다. 상대가 5리를 가자고 할 때 그 2배인 10리를 가자고 하면 상대에게 군법을 어기라는 소리가 되는 셈이다. 즉,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같이 가라는 말은 그러면 안 되는 군법을 들어 저항하라는 이야기가 된다.
셋째, 당시 로마의 말도 안 되는 세금 때문에 채무자가 굉장히 많았는데, 이때 저당 잡히는 것이 주로 겉옷이었다. 문제는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줘라’하면 ‘벼룩의 간을 빼먹냐 이 나쁜 자식들아’라는 반항의 의미로 간편하게 해석을 할 수 있는데, 성경은 반대로 말하는 점이다. 이걸 고의적으로 비틀어놓은 풍자적 말씀으로 해석하여도 저항의 의미는 그대로인데, 문학적 장치로 설득력을 맞바꾸려는 시도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별로다. 좀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재판으로 속옷까지 빼앗길 위험에 처했으면 이미 볼 장을 다 본 셈이다. 재산은 물론 소위 저당 잡힌 그 겉옷까지 빼앗긴 상태일 확률이 높기 때문에 속옷 달라는 채권자 하나에만 ‘다 가져라 이 나쁜놈아!’라고 말하라는 의미로 보긴 어렵다. 즉, 이는 주로 저당잡히곤 했던 겉옷을 빼앗아 간 자(채권자)와, 치부를 가리는 마지막 의복인 속옷마저 가져가는 구조적 착취(로마제국) 둘 다 비판한 셈이 된다.
겉옷과 속옷에 관한 문화적 이야기는 사실 더 할 게 많은데, 이 이상 길어지면 사족이 너무 긴 것 같아서 감히 생략.
위 세 가지 근거를 통한 해석은 예수의 가르침의 결을 바꿔준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무저항이 아니다!)이나 우리나라의 촛불혁명이 이 가르침에 적합한 것 같다. 문제는 이렇게 볼 때에도 여전히 42절의 해석은 난해한 상태로 남게 된다. 여지없이 ‘달라는 사람한테 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산상수훈 내용을 저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의 언행에서 발생한 모순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면서도, 산상수훈에서 말하려는 ‘바리새인들의 도덕적 의로움보다 더욱 수준 높은 의로움을 너네가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는 적절한 자세라고 생각된다. 결국 바리새인들 지키는 것보다 더 철저하고 엄격하게 지키라는 게 아니라, 단순히 엄격한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거나, 그들이 지키는 모세 당시의 율법이 담지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인식을 깨버리는 건 마찬가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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