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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다/아름다운교회

광야를 지나며

오는 주일이라면, 아니 사실 원래는 더욱 일찍 새건물에 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어야했다.

단순히 완공이 늦춰짐을 넘어서 광야생활 자체가 늘어나 고 있다. 일련의 시간들을 보내며 우리의 이런 시간들이 마치 출애굽세대의 광야생활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가 금송아지를 숭배했다거나, 우리 중 일부가 우리가 결코 새건물을 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뭐 이런 고백을 해 서 징벌을 받는단 의미는 아니다.

건물에 의존하지 않는 교회. 진정 구별된 자들의 모임에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 그리고 우 리들 서로를 향한 진정성을 똑똑히 보고있단 생각이 든다. 수직관계와 수평관계의 재점검. 교회=건물이란 생각이 팽 배한 이 시대에, 원어적 의미(에클레시아;구별된 자들의 모임)의 교회가 퇴색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 체에 참으로 하시고자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 분의 뜻은 어떻게 흘러갈까? 길어져만가는 시간 가운데 우리 중 누군가는 '차라리 옛 건물 그대로 있으면 될거를 왜 굳 이 새건물을 지어서 이런 고생을 하는가', '차라리 완공될 때까진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까' 등등의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지치는 기색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을 의심하 는 자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나 자신도 확신이 흔들렸다 는 부끄러운 고백을 한다. ㅎㅎ

그러나 일전에 내가 말했듯, 단순히 건물이 새로워진다고 교회가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몇 억을 들인 건물에 이 전과달리 여러가지 것들을 할 여건이 생기며, 좀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예배당 자체가 넓어짐은 물론 시설 자체가 세련됨은 말할 것도 없다. 진정 새 부대 자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경고하신대로, 새 부대자루 에 담길 것이 새 호도주이며,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헌 옷에 붙이면 새옷만 공연히 버리며 어울리지도 않으리란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건물이라함은 사실 아름다운 교회의 일부일 뿐이고 껍데기일 뿐이다. 결국은 교회를 구 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러한 구별된 자인 우리들이 므로, 우리가 변하지 않고는 도무지 새건물이란 의미가 없다.

하가원에서 드리는 예배 가운데 우리들의 출석률, 대예배 한 번으로 끝나는 주일일정가운데 우리들의 셀모임, 주중 에 기도하고 모일 공간이 마땅잖음에서 오는 우리들의 일 상예배 그 모든 것에서 우리가 건물에 얽매이는지 아닌지 를 보게 된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런글을 쓰는 내가 다 잘 해서 판단하듯 글 쓰는게 아님을 알아주시길) 이것이 나 한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일 것이며, 교회공동체에 묻히지 않고 드러나는 나의 알맹이일 것이다,

다 보여드리고 다 까발린 후에야 우린 새 예배당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다 보여드리고 다 까발려드림이 옳다. 공관복음 모두에 등장하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자루 의 비유, 특히 누가복음에서의 이 비유가 최근 내 마음에 계속 감동이 된다. 묵상하고 곱씹을수록 우리공동체를 향 한 하나님의 메시지 중 하나란 확신이 든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우리가 많은 일을 하기 위한 기능 적 준비의 시간이 아님을 명심하자. 황소를 드림보다 진정 한 예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앞에, 제사보다 순종을 기 뻐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무엇을 정 결케할 지 스스로가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각자를 향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부분은 분명 다를테지만, 그것을 힘 써 알아가는 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하리라.

광야, 광야, 광야... 시와 그림의 광야를 지나며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우리가 드릴 마땅한 고백이기도 하다.

주는 내 광야를 통해 주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네 주는 내 광야를 통해 그와 동행하는 법을 알게 하시네

혈기가 빠져 우리의 열심이 가라앉아, 새 건물 가운데 새 로워질 우리 아름다운공동체를 성령께서 더 자유로이 운 행하실 수 있기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