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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다/아름다운교회

2008년 몽골영상을 다시 본 후 2008몽골 영상을 보며, 새삼 달라진 내 신앙을 느낀다. 치유사역이 일어나는 현장들을 보면서 전처럼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구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힘을 빌려주시고 이루시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그저 성령의 자연스러운(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역사하심을 우리가 민감하게 잡아내는 순간에 '기도'로 풀어내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힘을 빌리는 것 조차 과분하다고 해야하나. 그 넓고 원대한 총체적 흐름을 캐치해서 풀어내고, 우리가 (각자의 그릇대로)경험한 사랑과 위로를 전달하며 그를 통해 또 위로와 회복을 얻는... 아 뭐 같은 말인가?ㅋㅋ 하지만 뭐랄까,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늦은밤 찾아온 친구의 간청 비유와 함께 알려준 성령을 보내신단 게 '내가 구하는 것 보다 더 크고 놀라운 것, 더 원대한.. 더보기
찬양인도자의 대표성에 관하여 찬양인도를 하다보면, 분명히 감정의 고양이나 단순한 흥분을 넘어선 지경에 이를 때가 있다. 기껏해야 성령충만이니 영적 흐름에 민감해졌니하는 헛점많은 설명밖에 할 수 없지만, 분명히 그럴 때가 있다. 이때 종종 내가 이 흐름을 제어하려다가 금방 식어버리거나 회중들이 하나님 앞에 자유하거나 친밀해지는(혹 자유하며 친밀해지는) 경우에 당면한다. - 모세가 출애굽 후 광야에서 백성들과 생활할 때 그 걸음을 제 스스로 인도하고 재촉한 것이 아니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고, 이때 모세는 그저 그 이끌림과 인도하심을 받는 출애굽공동체의 대표적 이름에 불과함을 철저히 보게 된다. 이때 모세라는 이름은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원한 하나님의 대변인이라기보다 차라리 신음하는 모든 백성들의 탄원을.. 더보기
광야를 지나며 오는 주일이라면, 아니 사실 원래는 더욱 일찍 새건물에 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어야했다. 단순히 완공이 늦춰짐을 넘어서 광야생활 자체가 늘어나 고 있다. 일련의 시간들을 보내며 우리의 이런 시간들이 마치 출애굽세대의 광야생활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가 금송아지를 숭배했다거나, 우리 중 일부가 우리가 결코 새건물을 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뭐 이런 고백을 해 서 징벌을 받는단 의미는 아니다. 건물에 의존하지 않는 교회. 진정 구별된 자들의 모임에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 그리고 우 리들 서로를 향한 진정성을 똑똑히 보고있단 생각이 든다. 수직관계와 수평관계의 재점검. 교회=건물이란 생각이 팽 배한 이 시대에, 원어적 의미(에클레시아;구별된 자들의 모임)의 교회가 퇴색한 이 시대.. 더보기
마지막 예배를 드린 후 칠년동안 다닌 교회건물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렸다. 내 영이 나고자란 소중한 영적고향이 자리를 옮겨간다. 만감이 교차한다. 이곳에서 흘린 눈물이 바닥 곳곳에 베어있고 이곳에서 부르짖은 통곡이 곳곳에 새겨져있다. 여기서 고백한 기쁜 이야기도 곳곳에 스며있다. 슬프고 답답할 때 밤낮가리지않고 달려와 내 마음을 토로하였던 곳이고, 밤느즈막하게 와서는 미송펼쳐놓고 건반으로 음짚어가며 한 곡 한 곡 배워가고 부르며 은혜를 누렸던 곳이었다. 언제고 마음편히 머물며 또다른 나의 집이되어주었던 이 건물이 이제는 휑하니 속이 비고 또 다른이름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오늘 드린 마지막예배를 끝으로... 나는 더이상 이 곳에서 나의 삶을 풀어갈 수 없게되었다. 한편 옮겨질 예배당은 아직 완공되지 않았기에 약 3주간 거처없는 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