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인도를 하다보면, 분명히 감정의 고양이나 단순한 흥분을 넘어선 지경에 이를 때가 있다. 기껏해야 성령충만이니 영적 흐름에 민감해졌니하는 헛점많은 설명밖에 할 수 없지만, 분명히 그럴 때가 있다. 이때 종종 내가 이 흐름을 제어하려다가 금방 식어버리거나 회중들이 하나님 앞에 자유하거나 친밀해지는(혹 자유하며 친밀해지는) 경우에 당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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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출애굽 후 광야에서 백성들과 생활할 때 그 걸음을 제 스스로 인도하고 재촉한 것이 아니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고, 이때 모세는 그저 그 이끌림과 인도하심을 받는 출애굽공동체의 대표적 이름에 불과함을 철저히 보게 된다.
이때 모세라는 이름은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원한 하나님의 대변인이라기보다 차라리 신음하는 모든 백성들의 탄원을 대표하는 이름이라고 봄이 좀 더 정직한 의미일 것이다. (모세 스스로가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한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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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서, 찬양인도자도 마찬가지이지 않겠나. 이 형언하기 힘들고, 선뜻 풀어서 쓰기도 벅찬 상황에, 내가 감히 바람같은 그 분의 움직임을 제어하거나 나의 어떤 행동이나 의지로 회중들에게 부어버리려는 교만을 버리고, 나 역시 하나님을 알고 더 친밀히 누리기 원하는 회중들의 이름 중 하나라는 입장을 분명히 선택하여 자연스레 녹아드는 것이 낫더라.
어떻게 하려들기보다 되어지는대로(좀 지나친 이중피동인가?) 잠기게 되면 회중이란 이름 속 한사람한사람의 '나'도 저마다의 충만함을 누리게 되고, 이것이 마치 무질서같으면서도 대단히 안정적인 무언가를 빚어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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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인도를 신학적차원에서 풀어내면서도 현장성을 외면하는 현학이 되지 않기란 참 힘들다. 나름 찬양인도자들의 서적이나 찬양인도에 대한 서적들을 읽어봤지만 이 두가지를 균형있게 다루는 책을 찾는 것이 너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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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위험(?)을 불구하고 이렇듯 글을 써내는 이유는, 정말 어젠 굉장한 시간이었단 생각이 들어서다. 여운이 채 가시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좀 더 나누고픈 말이 있지만, 글 전체의 방향을 위해 여기서 줄인다. 곧 다시 나눌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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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출애굽 후 광야에서 백성들과 생활할 때 그 걸음을 제 스스로 인도하고 재촉한 것이 아니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고, 이때 모세는 그저 그 이끌림과 인도하심을 받는 출애굽공동체의 대표적 이름에 불과함을 철저히 보게 된다.
이때 모세라는 이름은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원한 하나님의 대변인이라기보다 차라리 신음하는 모든 백성들의 탄원을 대표하는 이름이라고 봄이 좀 더 정직한 의미일 것이다. (모세 스스로가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한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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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서, 찬양인도자도 마찬가지이지 않겠나. 이 형언하기 힘들고, 선뜻 풀어서 쓰기도 벅찬 상황에, 내가 감히 바람같은 그 분의 움직임을 제어하거나 나의 어떤 행동이나 의지로 회중들에게 부어버리려는 교만을 버리고, 나 역시 하나님을 알고 더 친밀히 누리기 원하는 회중들의 이름 중 하나라는 입장을 분명히 선택하여 자연스레 녹아드는 것이 낫더라.
어떻게 하려들기보다 되어지는대로(좀 지나친 이중피동인가?) 잠기게 되면 회중이란 이름 속 한사람한사람의 '나'도 저마다의 충만함을 누리게 되고, 이것이 마치 무질서같으면서도 대단히 안정적인 무언가를 빚어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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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인도를 신학적차원에서 풀어내면서도 현장성을 외면하는 현학이 되지 않기란 참 힘들다. 나름 찬양인도자들의 서적이나 찬양인도에 대한 서적들을 읽어봤지만 이 두가지를 균형있게 다루는 책을 찾는 것이 너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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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위험(?)을 불구하고 이렇듯 글을 써내는 이유는, 정말 어젠 굉장한 시간이었단 생각이 들어서다. 여운이 채 가시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좀 더 나누고픈 말이 있지만, 글 전체의 방향을 위해 여기서 줄인다. 곧 다시 나눌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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