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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4일 내 말이 독과 칼이 되어왔음을 고백한다. 싸구려 지적 허영과, 가르침과 깨인 목소리 등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포장된 '자기의'가 내 안에 있었음을 고백한다. 부끄러우면서도, 실로 내가 쌓아온 것들이 아깝지만 그야말로 '내가 쌓은 것들'이므로 무너지기 전에 스스로 무너뜨린다. 말조심 글조심 삶조심. 그리고 조바심내지 않는 마음으로 나는 좀 더 서행하며 삶을 걸어야겠다. 나는 수직에서 느끼는 보잘것 없음을, 양 옆을 보고 자위하며 쉬이 망각해왔다. 더이상 은연중 상처를 주며 교묘히 나를 죽이는 짓거리는 못 하겠다. -9/14 더보기
9월 10일 민족과 열방의 다양성이 꼭 바벨탑사건의 결과라고만 볼 수 있는가? 설령 그렇다쳐도 그 가운데서도 복음이 유연하게 그것들을 포용하며 변화시킬 수 없는가? 복음 자체에 어떤 민족성과 문화적 에너지가 존재하는 지 의문이다. 심지어 초대교회, 심지어 예수님의 설교방식, 심지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다루심도 유대민족의 문화와 민족성을 토대로 조정됐는데, 그것이 마치 하나님 그 분 자체의 성질로 오인되지는 않는가? 땅 끝까지 이를 복음과 이방선교에 대한 베드로의 태도를 다루시고,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다양한 민족의 성향에 따라 전도할 수 있었던 바울을 들어 쓰신 그 하나님께서 단순히 복음이라는 그 소식이 하나의 제도적인 틀로써 또 다른 권력으로 변질되는 것을 원하시는 지는 잘 모르겠다. 바벨탑으로 인해 흩어진 언어는 .. 더보기
9월 8일 내가 얼마의 달란트를 받았느냐보다 내가 얼마나 그 달란트를 사용하였는가가 더 중요하다. 타인과 비교하면서 끝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의 달란트를 무시한 채 차이를 차별로 받아들이면 결국 스스로 문 밖에 걸어나가 이를 갈게 되지 않을까? 다섯달란트를 번 자도, 두 달란트를 번 자도 결국 똑같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었다. 핵심은 얼마나보다 어떻게가 아니겠는가? 자기가 가진 것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불신자보다 미지근한 종교인들이 더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구원이 없다곤 말 못 하지만 그렇다고 '있는가?'를 물어봐도 난 모르겠다. 기회나 가능성 면에서 적어도 이런 자들은 불신자보다 더 불리한 입장에 놓여있다. - 9/8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