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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패도 괜찮아? 셀모임 도중에 느꼈던 것 하나. 둘 중 하나는 해야한다. 교회가 그래도 괜찮아라고 진짜 말하고 푿어주던지, 아니면 우리가 그래도 괜찮은 하나님이라 가르치질 말던지. 허울뿐인 말엔 이제 속지 않는다. 전에 모 목사가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는 도발젇인 제목의 책을 출간했는데 어느순간부터 그 심정이 이해가 되더라. 그래도 숨어들어 낮고 작은 곳에서 사랑을 숨쉬는 사람들을 믿는다. 찾아 연합하고자한다. 여기서부터 다시 풀어내련다. 여전히 희망의 열쇠는 교회에 있기때문이다. 아프고 더럽고 지랄이어도 그것은 타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그리고 나의 문제고 나의 허물과 상처이기 때문이다. 관조하고 분석하는데서 외치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으리. 진정한 교회, 에클레시아, 분별된 사람들의 모임이 곳곳에서 분연히 일어나.. 더보기
달리기 오늘 SNS에서 말다툼이 있었다. 나는 일정수준 이하의 인격을 지닌 사람들에게 사랑없이 냉정해진다. 조금 전도 내 약함과 악함을 토해내고 말았다. 비꼬고 조롱하고.. 아주 잠간동안 그런 내 모습을 건방지게도 거룩한 분노라고 포장도 해봤지만, 그냥 분노에 불과하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머리론 어떻게 해아하는지 안다. 속칭 FM대로 하지 않더라도 좀 더 지혜로운 대처법이 있었단 것도 안다. 참, 이래서 사람의 삶은 달리기인가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치열하고 힘겹게 더보기
율법에 대한 단상 한조각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율법에 의거한 행위가 구원은 커녕 외려 악에 치우칠 수 있는 요소라고 말씀하셨다. 사랑의 두 방향, 수직과 수평에의 그것으로 온 율법을 압축하셨고 그것이 바울에게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엔 어떤 빚도 지지말라. 사랑하는 자는 온 율법을 이룬 자다'고 다시금 확증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보편적의미의 도덕률이나 가타부타의 판단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옳음에대한 추구나 갈망은 마치 탯줄의 흔적인 배꼽과 같아서, 우리의 존재가 분명 하나님과 이어져있었다는 증거라고 본다. 행위가 사랑을 잠식한 것이 율법이겠지만, 율법은 몽학선생(유아교사)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알아감에 있어서 불가분이라 여기는 바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덧붙여 야고보서를 휴짓조각취급했던 루터의 견해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