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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당시 유행하던 사조인 영지주의자들에게, 위 선언은 참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구절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신성 그 자체이신 예수님은 만물의 시작부터 계셨다고. 십자가에서 육신을 벗고 완전해지신 예수님께 어울리는 설명이지!' 그러나 사실 요한복음엔 '영지주의자들의 언어로 영지주의를 논파'하는 고도의 돌려까기가 담겨있다. 그들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해주어 그들이 잘못 인식하고 있는 점을 꼬집어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들에게 있어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말씀'과 '육신'이 하나가 되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읽던 영지주의자들은 그제서야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을 것이다. -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여러 신학자들이 그들만의 프레임으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지만 나 역시 거기에 숟가.. 더보기
두번째, 고통의 문제에 관하여 너는 아마 기억을 못 할테지만, 이맘때쯤 너는 굉장히 심한 감기에 걸렸고 아직도 완쾌되진 않았단다. 병원을 다녀온 뒤로는 눕혀놓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라도 생긴 것인지 고래고래 소리지르기까지 하더구나. 너의 고통을 내가 분담할 수 없음이 너무나 안타깝다. 진심으로, 너의 그 고통을 내가 담당하고 싶단다. 한 시간도 채 못 자고 일어나 엉엉 울며 얼굴을 긁어대는 그 고통이 나의 것이길, 그맘때쯤 하지도 않는 기침을 사래들리기 전까지 켁켁 해대는 그 고통이 나의 것이길 기도하고 바랐단다. 그런데 아들아, 나는 네가 아픈 와중 보이는 행동들을 통해 내 머릿속에서 명제적지식으로만 자리잡았던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라거나 그 때문에 주어지는 아들에 대한 시련을 조금 더 실질적으로 이해하게 되더구나. 아마 이건 두번째 .. 더보기
첫째, 너와 첫 예배를 드리며 시윤아. 이번 주일은 너와 함께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드리는 첫 예배시간이었다. 너를 안고 차에서 내려 교회 본당에 들어서기 전까지, 들뜨지 않으려 애쓰는 나의 노력은 모조리 수포로 돌아갔지. 네 어머니는 제발 아이를 안고 그렇게 붕뜨지 마라고 말하더구나. ㅎㅎ 예배시간에 너는 네 어머니와 함께 자모실에 올라갔고 나 혼자 예배를 드리면서, 자꾸만 강대상 위에서 목사님의 안수를 받을 네 모습이 생각이 나더라. 그래서 더더욱 주보에 필기 열심히 하면서 말씀을 들었지. 그리고 광고의 마지막, 태어나 처음으로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너를 위해 목사님을 비롯 전 성도가 기도해주시는 가운데 아빤 굉장히 많은 생각이 교차했단다. 너에게 복을 빌어 줄 수 있다. 똑똑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해달라는 것은 당연 아빠로.. 더보기
학교 청소노동자들의 시위가 끝났다. 작년 하반기부터 노조에 가입하면서 가속화되었던 문제가 올해 본격적으로 이어져 내내 파업이었다. 단식투쟁을 벌이면서 철야농성도하고, 총장실 앞에서 앉아있기도 하고 운동장에 나와 시위하기도 하고.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무슨 병에 걸린마냥 조용했다. 학교에 복학한 이후 줄곧 참 된 복음화는 사영리를 모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해오면서도, 학교에 일어나는 이런 크고 작은 불합리함-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진 결과에 침묵해왔던 내 부끄러운 모습을 참 많이 괴로워했다. 안녕하세요 열풍이 불 때도 우리학교는 비참했다. 그때 나는 마찬가지로 침묵했다. 대자보에 무언가를 붙일만큼 내가 깨어있지 못하다는 것과 그 이후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지만 사실 그걸 감당할만큼의 용기가 없었던.. 더보기
흑백논리가 야기하는 확률오류 우리는 흔히 "성공 아니면 실패니까 확률상 50%잖아. 용기내서 해 봐!"라는 식의 말을 아무렇지않게 하고 또 듣는다. 들을 때마다 묘한 위로가 되고, 마땅한 위로가 떠오르지 않을 때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뭔가 틀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러다 오늘 문득 깨달음이 왔다. 결과의 경우가 두가지 수라고해서 각 결과에 이를 확률이 공평하게 반반일 수는 없다는 것. 이걸 논리쩌는 사람들은 뭐라고 명명을 할텐데 마땅한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네. 결과의 수와 과정의 수? 방법의 수? 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어렵네. 풀어보자면 이렇다. 다음과 같은 동그란 룰렛이 있다. 이 경우 룰렛을 돌리면 얻는 결과는 파랑아니면 빨강, 즉 두 경우 뿐이다. 그러나 빨간 영역보다 파란 영역이 월등히 많기 때문에 빨강에.. 더보기
사순절에 즈음하여 지금이야 SNS를 탈퇴해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순절에 즈음하여 SNS는 미디어금식을 하겠다는 메시지로 뜨겁게 달궈진다. 오히려 금식하기 전 보다 더욱 많은 글이 그 시기에 올라온다. 마음은 알겠는데 그 금식하겠다는 메시지에는 수상한 저의도 담겨있어보이는 건 순전히 내 삐뚤어짐 때문일까? 금식을 할 때 얼굴에 기름을 바르고 머리를 단장하라고 했고, 골방에 들어가 몰래 하라고 했던 말씀은 제자훈련 숙제로 곧잘 외우면서 말이다. 성서는 명제적 지식이 아니라 기술적 지식에 해당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종교적 성취를 통한 안도감을 누리기 위해 수많은 명제적 지식을 공부한다. 그건 영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발 되지도 않는 관습적인 금식 말고 진짜 마음을 찢는 금식을 했으면 좋겠다. 학교에선 비.. 더보기
강의를 하다가 가르침에대한 나의 은사와 적성일치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있다. 물론 이 점이 "완벽"을 뜻하지는 않지만. 오늘 중3들을 가르치다가 독서습관에대해 이야기를 한 점이 불현듯 떠오른다. 마침 성장소설의 대가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다루다보니 가르침의 습관과 나의 성장과정을 자연스레 묶게된다. 머리로 아는 영역들을 풀어놓는 게 쉽지않다. 부지중 내뱉는 말들과 온갖 반언어, 비언어적 표현들은 내 머리와 몸의 거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간곡하게 말한 것이 혹시 고압적으로 들리지는 않았을지, 빠른 말과 큰 소리가 습관을 넘어 모종의 억압이 되지는 않았을지, 하지말라보다 이런건 어떨까?라고 대안제시를 하는 것이 얼마나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는지 등등... 나 자신의 스승은 나다!-라고, 언뜻 들으면 크리스찬이 할 말.. 더보기
삭개오 일화를 묵상하며 - 2.내면화된 영성, 멀어지는 용납 삭개오. 사회적 권위는 가지고 있었지만 동족에게 외면당했던 사람. 동족으로부터의 소외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입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당사자가 오버하는 거라 생각할 만큼 말이죠. 그러나 이 소외감, 단절의 고통은 인간이 지닌 태초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절감정을 경험한 가인이 결국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살인자가 된 것을 보십시오(물론 그 거절감정만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 삭개오가 본래부터 재물을 많이 모으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를 영접할 때 우리에게 자유함 또는 자유 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찾아오는데, 삭개오가 벗어던진 것은 바로 그 ‘모아둔 재물’이기 때문이죠. 앞서 쓴 글에서 이 점에 좀 더 주안을 두었으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죄인 삭개.. 더보기
삭개오 일화를 묵상하며 - 1.구원에 대한 단상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깊이 있게 묵상하면서부터 참된 개념과 의미를 알기 위해 애쓴 단어, '구원'. 구원이 단순히 천국행 티켓을 미리 뽑아놓은 예매권에만 한정되지 않음을 어렴풋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서 정확히 무엇인지 그 개념을 잡는데는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말하긴 애매하지만... 그러나 찾는 자는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는 말씀처럼, 갈망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성경을 통해 조명되는 하나님의 지혜 덕에 좀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네, 그렇습니다. 저는 거듭났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단순히 신분의 변화로만 여기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더보기
SNS를 탈퇴했다. 여러 요인이 있었다. 제작년 말, 한차례 떠난다고 했다가 작년 오월에 갑자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비루했다. 탈퇴를 맘 먹었지만 내 자취를 남기는 것에 항상 공을 들이는 편이라 자료를 갈무리하다보니 며칠 더 걸렸다. 이제 14일 뒤 내 계정은 완전히 삭제가 된다. 입을 다물어야 할 시기이기도 하고, 같은 공동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의 의견차이와 갈등을 해결할 힘도 지금 나에겐 없더라. 작년 한 해 끔찍한 일들을 겪으며 사람 상대하는 게 좀 버겁기도 하고, 탈진 상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다시금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하나 끊어내고 나니 좀 시원하다. 당분간 내 앞에 주어진 것들에 좀 더 충실해야겠다. 더보기